배순훈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미국 MIT(마사추세츠공과대학) 박사 출신의 기술인이다. 그는 “기술은 심플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 참 많은 일을 해냈다. 카이스트 설립 멤버로 참여했고, 발전소도 건설했다. 대우전자 회장 시절에는 ‘탱크주의’ 광고로 명사가 되었고, 1998년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발탁되어 IT 강국을 만드는데 앞장섰다. 그는 교수도 했고, 대기업 회장을 지금도 하고 있지만 기술인으로는 별난 경력을 지니고 있다.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맡아 기무사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지은 것이다.
광복 70년을 맞아 DDP 광장에 영상 태극기가 곳곳에 나부끼던 8월 중순 [간송문화-매·난·국·죽 선비의 향기]가 열리는 배움터에서 배순훈 간송미술문화재단 후원회장을 만났다.
획 하나에도 살아있는 선인들의 지혜
배순훈 회장은 전시장에 들어서자 기술인답게 16세기 이정(李霆)의 《삼청첩(三淸帖)》에 그려진 대나무 획의 테크닉에 관심을 보였다. 삼청첩에 담긴 대나무 그림은 먹물을 들인 검은 비단에 금니(金泥)로 그려져 기법이 까다롭다.
“아교에 개어 만든 금박 가루를 붓에 묻혀 비단에 획을 긋기도 어려운데 잎맥의 느낌까지 섬세하게 살려낸 테크닉이 놀라워요. 재료의 활용법을 알고 정밀한 관찰과 사생, 숙달된 필력으로 그어내야 만이 이처럼 격조 있는 작품을 남길 수가 있는 것이지요.”
2 이정, 《삼청첩(三淸帖)》 [고죽(枯竹)], 흑견금니, 25.5×39.3cm, 간송미술관 미술작품 보러가기 >
덧칠도 할 수 없는데 색의 밝기와 흐림, 날렵한 붓의 기법으로 댓잎뿐 아니라 죽순과 뿌리까지 금빛으로 묘사해낸 문인 화가들의 고난도 테크닉이 수백 년 지난 오늘에도 생생한 감동을 준다는 설명이다.
“겸재 정선의 실경 산수에는 주변 경관과 함께 정자나 인물이 나오는데 획 몇 개로 집과 사람의 움직임까지 묘사해 내는 솜씨가 기가 막힙니다. 공간에 대한 정확한 계산, 고도의 숙련된 기법은 겸재 같은 천재가 아니면 엄두도 낼 수 없는 경지입니다. 겸재보다 한 세기 늦게 등장한 일본의 우끼요에(浮世畵)는 유럽에 수출된 일본 도자기 포장지로 사용돼 고흐와 모네가 영향을 받으면서 유명해졌지요. 우끼요에 중에 파도치는 물결 문양이 있는데 겸재 정선의 물결 묘사와는 격이 달라요. 겸재가 격(格)이 있다면 부세화는 거칠다고 할까요.”
배 회장은 조선시대 화가 중 단원 김홍도를 높이 평가했다. 화원화가로 살았지만 문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생활 자세를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번 간송 문화에 김홍도의 [신죽함로: 새 대가 이슬을 머금다]와 [백매(白梅)] 등이 선보였는데 사대부들 보다 더 문기(文氣)가 높은 사군자라고 할 수 있어요. 특히 오랜된 매화 등걸에 흰 꽃을 그린 백매는 소탈하면서도 시흥(詩興)이 넘치는 빼어난 작품이지요.”
선인들의 문화 유전자 확산은 미래의 성장동력
배순훈 회장은 간송의 수장품들을 보면 중국과 일본과 다른 특징이 있다며 그 독특한 인자를 찾아내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겸재와 단원에서 보듯 우리는 자유분방한 창의성을 지니고 있어요. 저는 그 같은 선조들의 유전자가 스포츠와 예술에서도 발휘되고 있다고 봅니다. 한국 여성들이 프로 골프나 양궁에서 세계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고, 드라마와 영화와 K 팝이 세계를 열광시키는 현상을 보면 그 한류의 뿌리에는 선인들의 이 같은 창의적인 유전자가 있다는 것이지요. 손재주와 디테일이 엄청나지 않습니까? 우리 세대는 어렵게 살아 그늘지고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밝고 자신감이 넘쳐요. 자기 하는 일을 즐기면서 자기 생긴 대로 표현하는 그 컨피던스(confidence, 신뢰, 자신감, 확신)야말로 우리 문화예술의 DNA에서 나온다고 저는 확신해요.”
미국에서 공부한 배 회장은 미국인들이 유럽 문화에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은 문화적 정체성(identity)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앤디 워홀이 팝 아트의 거장이기는 하지만 유럽에 비해 역사가 300년도 안 돼 깊이를 인정받지 못해서라는 것이다.
“우리는 삼국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는 수천 년의 역사와 독창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어요. 외세의 침략을 받아 자신감을 잃은 때도 있었지만 우리만의 자유분방한 유전자가 작용하여 경제성장을 이루고 한류를 세계에 전파하는 동력이 되었다고 봅니다.”
그는 광복 70년 만에 대한민국이 이만한 궤도에 오른 것은 우리 국민의 근면함도 바탕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창의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일제 식민, 미국의 아류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노하우와 기량을 살려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저도 대학에서 오래 가르쳤고 세계 여러 나라에 현지 공장을 세워 글로벌 경영을 해보았지만 한국인이 확실히 우수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잘 해요. 대우에 있을 때 영국, 프랑스, 스페인, 우즈베크, 베트남, 중국 등 22개국에 공장을 세워 현지인들을 1000~2000여 명씩 고용했지만 한국인들의 열정이나 능력을 당해내지 못했어요. 특히 난관을 해결하는 지혜와 역경을 뚫고 나가는 추진력이 탁월했어요.”
“학교 교육도 중요하지만 미술관, 박물관 같은 곳에서 우리 문화와 역사를 배우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화재나 예술 작품을 보면서 스스로 느끼고 거기에 무엇이 숨어있는가를 발견해 내는 것, 다시 말해 우리 몸속에 있는 창의적 유전자를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여 있는 한국은 이런 창의력 없이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고 봐요.”
빌바오 구겐하임과 MoMA를 거울삼아 간송미술관의 미래 설계해야
‘탱크주의 경영’으로 세계의 경제 현장을 누빈 배순훈 회장은 한국 상품을 세계에 팔기 위해서는 문화가 필요다고 강조했다.
“삼성 TV, 현대 차, 아모레 화장품 등이 세계 명품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과연 한국산이냐? 일본 상품인 줄 알았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업이 세계화를 이루기 위한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호텔 역시 우리 다운 서비스를 갖춘 곳이 있나요? 이제는 경제가 세계로 나가려면 문화가 없이는 안 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한 배 회장은 미술관의 역할을 입증한 두 가지 성공 사례를 꼽았다. 첫째는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 또 하나는 뉴욕현대미술관이다.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빌바오(Bilbao)에 세계적인 미술재단 구겐하임재단이 1997년 10월에 개관한 구겐하임미술관은 프랑크 개리가 설계한 독특한 건축에 우수한 소장품과 전시기획으로 세계적인 문화명소로 부상했다. 1929년 애비 앨드리치 록펠러 부인 등이 주축이 되어 개관한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근현대 미술 컬렉션으로 유명한, 뉴욕의 명물로 꼽히고 있다.
2 미국 뉴욕 도시에 있는 뉴욕현대미술관(MoMA)
“빌바오 구게하임미술관의 경우는 미술관이 도시를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빌바오시 인구가 30~40만 명인데 연 관람객이 200백만 명이 넘는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으니까요. 낙후된 철강 산업이 다시 부흥되어 첨단도시로 변모했어요. 이 모든 것을 빌바오 이펙트(효과)라고 하지요. 뉴욕현대미술관은 초창기 록펠러 집안 후원으로 설립되었는데 부자가 돈만 댄 것이 아니라 부통령과 뉴욕 주지사를 지낸 넬슨 록펠러는 MoMA 관장도 역임했어요.”
배 회장은 빌바오나 MoMA의 경우처럼 간송 컬렉션이 세계적 미술관으로 발돋움해야 한다며 자신이 그 시동을 거는 엔진 역할을 맡았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문화로 나라를 지킨다는 신념으로 소중한 문화재를 수집하셨고 전성우(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 전영우(간송미술관장) 두 아드님과 최완수 소장(한국민족미술연구소)이 힘을 합해 이를 지키는 역할을 잘 해왔어요. 특히 소장품을 연구하여 매년 봄가을 발표해온 간송문화전은 젊은이들과 주한 외교사절들까지 2시간씩 기다려 관람했을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 감흥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간송미술문화재단을 발족하고 DDP 전시를 시작한 만큼 이를 계기로 간송 컬렉션을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발전시켜 애호가들이 찾는 명소로 만드는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봅니다.”
2013년 8월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출범한 간송미술문화재단은 상설전시관 건립과 함께 대구에 분관 설치를 추진하고 있으며 최근 후원회도 발족시켰다.
배 회장은 간송미술문화재단의 궁극적인 목표 중 하나는 간송미술관의 상설전시관 신축이라고 했다. 그냥 상설관 신축이 아니라 세계 언론이 주목하는, 우리 정신문화의 중심이 되는 명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간송미술관 신축은 미래를 내다보는 지속 가능한 사업으로 추진되어야 합니다. 국가 지원이 따르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민간 차원의 후원으로 좋은 미술관을 갖는 캠페인을 벌여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도 기증 문화가 점차 활성화되고 있는 만큼 후원회를 통해 도네이션을 받고 최고의 전문가들을 투입하면 좋은 결과를 창출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는 정부 지원을 받으면 간섭이 따를 수 있다며 하버드대학처럼 비영리 기관도 수익을 올리는 후원 사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자면 모멘텀(계기)를 잘 잡는 것이 관건입니다. 현재 사립미술관으로는 최고 수준의 컬렉션을 가지고 있는 만큼 이를 어떻게 전시하고 보존하고 교육할 것이지 최고의 기획을 하고, 이 모두를 담을 건축과 보존 및 전시 기술 개발에 역량을 집중한다면 빌바오 구겐하임 못지않은 미술관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 활용한 노하우로 기부하고 싶은 환경 만들자
“밖에서 기증자들이 간송미술관을 위한 문화 사업이 마음에 들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을 펼쳐야 합니다. 또한 미국의 하버드대학처럼 비영리기관이 돈을 모으고 불리려면 적절한 보수를 주고 프로를 영입해야 합니다. 향후 미술관의 건축 설계나 큐레이팅도 최고에게 맡겨야 세계 명소가 될 수 있어요.”
성공적인 후원을 끌어내는 선진국의 노하우란 무엇일까?
“프랑스에서 업무 상담을 할 때 상대 쪽에서 미팅 장소를 루브르박물관의 19세기 프렌치 조각정원에 잡아 감동을 받았어요. 우리도 외국의 투자를 유치할 때나 후원금을 모을 때에 선진국처럼 문화와 예술을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이 일을 왜 해야 하는가를 알면 방법은 나오게 마련이라는 그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빌바오 같은 ‘미술관 신화’를 만들어 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전시정보
- 전시 : 매,난,국,죽_선비의 향기 展
- 기간 : 2015. 06. 04(목) ~ 2015. 10. 11(일)
- 장소 : DDP 배움터 2층 디자인박물관 지도보기
- 공식홈페이지 : www.kansong.org
관련정보 : 통합검색 결과 보기
글 : 정중헌 |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그림 제공 : 간송미술관, 전대식
발행 : 2015.09.02
출처 : 네이버 캐스트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