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은 1945년 광복이 되고 나서는 문화재 수집을 거의 중단하고 만다. 광복된 조국에서는 누가 수집하여 소장한다 해도 우리 문화재를 우리 민족이 수집 소장하는 것이므로 더 이상 신명을 바쳐 이를 수집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동족간의 이념대립으로 서로를 죽이는 상잔(相殘)의 비극이 전개되며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과 중공군이 남북에 각각 개입하면서 밀고 밀리는 전쟁이 계속되어 서울이 두 번씩 주인이 바뀌는 전쟁터로 바뀌게 되자 우리 민족문화재는 일제 36년 동안보다도 더 혹심하게 파괴당하고 인멸된다.
간송의 보화각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인민군이 진주했을 때 북단장은 기마부대에게 징발당해 국중 제일을 자랑하던 정원이 일거에 폐원으로 변했고 보화각 소장품은 전세가 불리해 지면서 북쪽으로 이송하기 위해 간편하게 포장되기 시작했다. 그 수많은 세월과 엄청난 재력, 그리고 열성을 다 바쳐 모아들인 다음 정성스럽게 손질해 오동상자 하나하나에 차근차근 넣어 깊이 비장했던 우리 민족문화재의 정수가 수난을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용물만 꺼내져서 큰 목통 속에 두서없이 포개어지고 못질 당했다. 이 작업을 직접 담당한 것은 뒷날 국회의원을 지낸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1~1981)과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1916~1984)였는데, 이들의 기지로 다행히 보화각 물건들은 북송되는 참화는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중공군에게 내주게 되었고, 간송은 인민군 치하에서 포장해 놓은 그대로를 가지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게 된다. 미국 헌병이 호송해 열차편으로 부산에 내려진 문화재들은 김승현 박사가 빌어쓰던 영주동 가자마 별장에 보관되고 간송의 차남 경우(景雨)가 지키고 있었는데 서울이 수복되어 환도한 뒤인 1953년 10월에 간송이 아무래도 불안하다고 서울로 옮겨온 지 10일 만에 이 별장에서 불이나 별장 전체가 전소했다고 한다. 참으로 또 한 번 참화를 당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국운이 비색한 암흑기에 조선(祖先)의 영령(英靈)들이 이 나라 문화재의 수호신으로 간송을 이 땅에 보냈는데 어찌 그리 허망하게 그 직무를 포기하게 했겠는가.
그러나 그 난리 북새통에 겨우 포장해 끌고 간 문화재만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을 뿐 보화각에 가득 남겨 놓고 떠난 것들은 참화를 면할 수 없었다. 간송은 우선 추사, 겸재, 단원, 혜원 등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 중 으뜸가는 분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해서 고려자기와 조선자기 등 우리 문화재만을 가지고 떠났던 것이다. 대부분의 중국서화나 중국자기를 비롯해서 그 밖의 서화 골동품 등은 두고 떠났었고 수만 권 장서도 그대로 표구소하던 한옥에 가득 쟁여 놓고 떠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간송이 부산에 도착했을 때 그가 남겨 놓고 온 물건 중의 일부가 부산에 먼저 내려와 있을 정도였었다 하니 그 정황을 대강 짐작할 만하다.
간송은 피난생활 3년을 울산의 박기중 가에서 보내고 1953년 서울에 올라 와서 이런 참경을 목도했던 것이다. 일제 36년의 암흑기에 우리 전통문화를 단절시키지 않게 하려고 10만석 재산 의 전 재력을 기울여 수집한 찬란한 그 문화재들이 이렇게 우리민족의 손에 의해 허무하게 파괴 인멸된 현장을 목도했을 때 느껴야 했던 간송의 비애와 고통이 어떠했었겠는가. 이제는 다시 모을 수 없는 그 진본 희본들이 불쏘시개로 사라지고 창호지나 벽종이로 산산이 흩어져 버렸으니.
그러나 간송은 대인이라 이것도 국운이고 민족운이겠거니 생각하고 아픈 가슴을 진정시키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로 그 혼란 속에서도 다시 우리 문화재 수집에 나서 자신에게서 흘러나간 것들을 다시 사 모으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