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를 수집하여 보호하겠다는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력 있는 일본인 수장가들과 불꽃 튀는 경쟁을 벌여야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골동품이란 항상 부귀를 따라 흐르는 것이라 이를 수집한다는 것은 막대한 재산과 그를 애호하는 지극한 정성을 겸비하지 않으면 차지하기 어려운 것인데 이를 이제 30세도 안된 조선 청년이 모아 보겠다고 나섰으니 아무리 십만 석 지주의 유일한 상속인이라 할지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모르는 어려움을 겪게 되고 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정적인 슬픔 따위에 오래 묶여 있을 새가 없었던 것이다. 간송이 그 일을 수행해 가는데 어찌 어려움만 있게 했겠는가. 우선 위창이라는 선각자를 미리 보내어 서화사 연구의 기초를 닦아 놓고 기다리게 했으며 위창은 간송을 위해 이순황(李淳璜)이라는 정직한 거간(居間) 하나를 키워 놓았다가 간송에게 붙여 주어 서화골동의 수집일을 전담하게 한다. 그야말로 삼박자가 척척 맞아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순황이 모아들이면 위창이 감정하여 살 것은 사게 했으니 불과 25세 밖에 안된 청년 간송이지만 실수할 리가 없고 물건을 모아들이지 못할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