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간송이 공식석상에 참석하는 자리는 오직 문화재 보존위원회 뿐이었다. 미군정시절의 고적보존위원회 시절부터 이 회의 위원으로 위촉 받아 활동했던 모양이다. 당시 간송만큼 문화재 보존 문제에 관해서 해박한 지식과 투철한 의식을 가진 이는 없었을 것이며 수집보호에 이르러서도 그를 능가할 인물은 없었을 터이니 그 보존을 위한 자문위원회에 간송이 빠지고서는 그 위원회 자체가 성립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이후 고적보존위원회가 문화재보존위원회로 바뀌면서도 간송은 계속 제1분과와 제2분과 위원을 겸임하는 유일한 겸임위원이었다 한다. 간송은 6·25를 거치고 나서 우리 문화재가 전화를 입어 곳곳에서 무참히 파괴된 것을 너무 안타까워했기 때문에 간송답지 않게 여기에는 열심히 나가고 고적보존과 문화재 보호에 앞장서기 위해 장기간에 걸친 고적조사여행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환도 후인 1954년부터는 당시 국립박물관의 간부들이던 남운(南雲) 이홍직(李弘稙, 1909~1970),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1916~1984), 초우(蕉雨) 황수영(黃壽永, 1918~2011), 수묵(樹黙) 진홍섭(秦弘燮, 1918~2010), 삼불(三佛) 김원룡(金元龍, 1922~1994) 등과 깊이 사귀게 되는데 특히 혜곡과 초우는 매일 만나다시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