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이 35세 나던 해인 1940년 2월 11일에는 창씨개명령(創氏改名令)이 내려져 우리 민족이 일본 민족으로 흡수되는 위기를 맞았던 해였다. 이미 1938년부터는 일제가 학교 교육과목에서 조선어 과목과 한문(漢文) 과목을 폐지하여 언어말살 정책을 노골적으로 시행하고 있었는데 이제 일본어 상용과 창씨개명이라는 극한적인 민족 말살정책을 강행하게 되니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던 우리민족의 찬란한 문화전통은 이제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에 간송은 민족 교육의 요람으로 고종의 칙지를 받들어 개교했었던 보성고보(普成高普)가 경영난에 봉착하여 폐교의 위기를 당하게 되자 60여만원의 거금을 쾌척하여 재단을 인수하였다. 간송이 이처럼 막대한 출혈을 감내하면서도 보성을 인수한 것은 우민정책(愚民政策)으로 우리민족을 영원히 노예로 만들려는 일제의 교육정책에 항거하여 우리민족에게 고등교육을 시키겠다는 것이 첫째 목적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그렇게 해서 우리전통문화를 계승할 인재를 양성한다는 원대한 포부가 숨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