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동(骨董)은 돈과 권력을 좇는다는 점에서 기생과 같다는 옛말이 있다. 문화재급 고미술품이 주로 부자와 권세가 주변을 흘러 다닌 사실을 빗댄 얘기다. 한국 문화재 5000년 고난의 역정은 돈 놀음과 힘자랑에서 그치지 않았다. 외세 침략기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격변을 겪으며 여린 그 목숨을 보존하느라 기를 써야 했다.
지난 5월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이달 15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첫 공개된 고려 나전경함은 그렇게 살아남은 명품(名品) 가운데 한 점이다. 900여 년의 세월을 건너 귀향한 경함은 아쉽게도 일본 소장자가 서둘러 보수한 탓에 불경을 보관하던 상자 전면에 장식된 모란당초무늬와 연주문 등 섬세한 문양들이 뭉개지거나 칠에 덮여져 버린 상태여서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나라가 어려울 때 그 위기를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려는 고려의 국격(國格)이 찬연한 일품(逸品)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수백 년을 뛰어넘을 저런 빛이 있는가, 가슴이 저렸다. 국가가 근심과 재난에 빠졌을 때 국민을 한 마음으로 묶어준 저 기운이 문화의 힘이 아닐까 싶었다.
문화재 환수는 이렇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왜 그토록 소중한 조상의 유산을 약탈당하거나 분실하거나 훼손했을까 반성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고가(高價) 거래는 문화의 질을 담보하는 자부심이 되기도 한다. 그 지표가 민족문화의 평가 상징으로 해석돼서다. 때로 문화재나 미술품을 둘러싼 분쟁이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는 이유다.
올 초 한국 고미술계는 분한 소식 하나를 들었다. 세계 양대 경매회사의 하나인 크리스티가 봄·가을 두 차례 뉴욕에서 여는 ‘일본 & 한국 고미술품 경매’에서 한국 것을 제외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크리스티는 앞으로 일본 작품 위주 공식 경매만 열고 한국 고미술 쪽은 온라인과 개인 문의만 진행한다고 밝혔다. 날로 거래량이 늘고 경매가 과열되는 중국 미술품과 비교하면 한국 미술품은 찬밥 신세요, 낙동강 오리알인 셈이다.
20여 년 전만 해도 한국 고미술품은 기세가 좋았다. 국내보다 오히려 국외에서 외국인들이 그 가치를 인정한 사례가 많았다. 1996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당시 환율로 64억원에 낙찰된 ‘철화백자 운용문 항아리’는 그때까지 아시아 미술품 거래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불과 10년 뒤인 2006년 비슷한 유형의 철화백자는 16억원 대에 팔렸다. 요즘 고미술 전문가들은 한국 고미술품 가격이 10분의 1 이하대로 떨어졌다고 한숨짓는다. 이에 반해 중국 미술품은 낙찰가가 수십 배 이상 뛰고 거래량도 무섭게 늘어나고 있다. 중국 미술품 상승세는 나라의 힘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세계 미술사에 이미 자국의 개성을 확고히 한 일본, 확대일로를 걷고 있는 중국 틈에서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정신 바짝 차릴 때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 시점에서 되돌아보고 싶은 인물이 간송(澗松) 전형필(1906~62)이다. 일제강점기 대지주의 후손으로 태어나 억만금 재산과 젊음을 바쳐 일본으로 유출되는 한민족의 유물을 수집해 이 땅에 남긴 민족 문화유산의 수호신이다. 당시 경성의 번듯한 기와집 400채를 살 수 있는 돈을 바쳐 인수한 고려청자를 비롯해 꼭 지켜야 할 보물을 손에 넣기 위해 간송이 펼친 낙찰 비화들은 곧 텔레비전 드라마로 선보일 만큼 극적이다.
간송이 1938년 서울 성북동에 우리나라 최초 사립박물관으로 세웠던 간송미술관은, 지난 3월 개관 76년 만에 처음 소장품을 외부로 내보내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대표 소장품전 ‘간송문화(澗松文華)’를 열었다. 12만 명 유료 관람객이 든 1부에 이어 9월 28일까지 계속되는 2부 전시장은 요즘도 ‘문화로 나라를 지킨’ 간송을 찾는 이들로 북적인다.
왜 지금 간송일까. ‘나라 꼴이 이게 무언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한탄하는 우리에게 민족정기 넘치는 선조의 보물은 눈을 맑게 씻어 주고 거친 숨통을 틔워 주는 바람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어려운 시절에 간송의 사명감을 이어받아 우리 문화재 보존에 일생을 걸 후예는 어디 있는가.
정재숙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
출처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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