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탄생 110주년 기념전
간송(澗松) 전형필(1906~62)은 우리 전통 문화의 자존심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대지주의 후손으로 태어나 억만금 재산과 젊음을 바쳐 일본으로 유출되는 한민족의 핵심 유물을 수집해 갈무리했다. 그가 1938년 서울 성북동에 세운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1호 사립박물관이자 한국 미술의 보물 곳간으로 국내외에 이름났다. 올해는 민족 문화유산의 수호신인 간송 탄생 110주년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이사장 전성우, 이하 간송재단)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기념전을 열고 문화재청과 업무협약을 맺는 등 이 땅의 미래를 걱정한 간송의 뜻을 새롭게 이어나간다.
2 거울 설치작업으로 간송의 정신을 오늘 우리에게 연결하는 이창원 작가의 ‘간송의 기억’.
3년여 전인 2013년 8월 8일 간송미술관(관장 전영우)은 76년 역사에 분수령이 될 중대 발표를 했다(중앙일보 2013년 8월 9일자 2면). 8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소장품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던 굳은 관례를 깨고 개관 이래 최초로 외부에서 기획전을 연다는 계획안을 내놨다. 2014년 3월 개관하는 DDP에서 2017년 봄까지 3년 동안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장기 기획전을 연다는 내용이 뼈대였다. 문화계는 이 역사적 소식에 깜짝 놀랐다. 해마다 5월과 10월, 단 두 번에 걸쳐 2주씩 무료 기획 전시를 하는 것 외엔 문을 닫아걸고 연구에 전념하던 간송미술관이 그 철통같은 빗장을 열고 바깥나들이를 한다니 빅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간송미술관은 ‘은둔의 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소장품의 보존에 지극정성을 쏟은 것으로 이름났다. 외국 유명 미술관이 소장품 몇 점을 대여해 줄 것을 요청하자 미술관 부설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 소장이 “꼭 보고 싶으면 여기 와서 보시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오로지 미술사 연구로 분명하게 살려내야 한다는 책임감과 목적의식이 대쪽 같았다.
간송재단이 외부 첫 전시를 나선 이후 2년6개월이 흘렀다. 6회에 걸친 ‘간송문화전(澗松文華展)’은 성북동 시절보다 편리하고 쾌적한 관람 환경으로 국내외 미술 애호가의 사랑을 받았다. 제1부 ‘간송 전형필’을 시작으로 제2부 ‘보화각(간송미술관의 옛 이름)’, 제3부 ‘진경산수화’, 제4부 ‘매·난·국·죽’, 제5부 ‘화훼영모’, 제6부 ‘풍속인물화-일상, 꿈, 그리고 풍류’는 문화로 나라를 지킨 간송의 뜻을 널리 알리기에 충분했다. 간송의 주요 컬렉션을 바탕으로 한 성북동 시절의 연장선상에 있는 기획전이었지만 일부분 첨단 미디어를 이용한 새 작품을 선보여 대중과 호흡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간송의 새로운 100년을 책임진 전인건(45) 간송재단 사무국장과 전인성(37) 이사는 “간송 현대화의 실험 시기로서 많이 배우고 깨친 시간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간송재단이 공들여 마련한 도약의 새 밑그림을 선보인다. 제7부에 와서 최초로 현대미술 작가들과 협업하는 전시회를 간송 탄생 110주년전으로 마련했다. ‘OLD & NEW-法古創新(법고창신):현대작가, 간송을 기리다’. 23일까지 서울 DDP 배움터 2층 디자인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회 제목이다. ‘법고창신’은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 젊은 작가 35명이 설치·회화·영상 부문에 걸쳐 신작을 내놨다. 주제는 대체로 세 갈래로 나뉜다. 간송의 업적과 인생을 기리는 작품, 간송재단의 국보급 소장품을 재해석한 작품, 고미술과 조화를 시도한 협업 작품이다.
전시를 기획한 이진명 큐레이터는 “우리 문화의 특질은 무엇인가, 간송의 인생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를 작품으로 묻고 싶었다”고 했다. 특히 간송이 평소에 강조하던 예술관, 즉 “예술품의 존귀한 바는 그것이 우수한 작품일수록 그 시대와 문화를 가장 정직하고 똑똑하게 우리에게 보여주는 까닭에 있다”는 한마디를 오늘의 미술가들과 나누고자 했다고 밝혔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의미, 사회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태도에서 예술의 의미가 발현된다는 간송의 뜻을 전시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한 예가 이창원 작가의 거울 설치작업인 ‘간송의 기억’이다. 전형필 선생의 프로필 사진을 벽면에 비춰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 시공의 합일을 자아낸다. 사재를 털어 민족문화의 정수를 지킨 간송의 의지가 오늘 우리 가슴으로 전해진다. 간송은 “‘나의 것’에 대한 노력만이 앞으로 기대되는 새로운 국보의 발견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법고창신의 정신이다. 조상과의 대화야말로 우리의 미래라는 가르침이다. 일제가 고구려로부터 조선시대까지 전통 문화를 폄하하고 유물을 빼돌린 바탕에는 우리 정신력 회복의 근원적 힘을 뺏어버리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해석이다.
이세현 작가의 ‘붉은 산수’는 겸재 정선의 ‘삼원법’과 우리나라 과거사의 흥망성쇠를 결합시켰다. 그의 산수가 붉은 까닭은 고난에 찬 우리나라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상흔의 은유로 적색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코디 최 작가는 『명심보감』을 재해석한 ‘VIRTUE 714’로 조선 선비 정신을 형상화한다. 최현준 사진가는 인왕산을 촬영한 8폭 병풍 ‘신인왕진경팔폭’으로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를 기린다.
영상작가팀인 김기라·김형규 2인조는 미황사·실상사·대흥사의 24시간 일상을 360도 회전 및 타임랩스 기법으로 기록했다. 참된 본성을 찾아 소탈하고 우직하게 나날을 반복했던 우리 조상의 삶을 추체험하게 만들었다. 팝아트로 번안한 작품도 눈길을 끈다. 간송의 청년기 인물화를 팝아트로 재해석한 윤기원, 단원 김홍도의 ‘과로도기’와 현재 심사정의 ‘해섬자희’를 탈속의 기인들로 그려낸 장우석의 ‘진술서’는 유쾌한 시각 체험이다.
조선 백자 용항아리와 청화백자, 고려청자는 도예가인 신이철·정진원·이하린의 손에서 현대 도자로 변신했다. 신이철 작가는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로봇 용을 빌려온 ‘청화백자사이보구용문대호’로 관람객을 즐겁게 한다.
간송재단은 11월에 열 제8부이자 DDP에서의 마지막 전시로 ‘문화로 세상을 바꾸다-간송과 백남준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간송의 문화수호 정신과 백남준의 문화도전 정신을 접목해 한국 문화의 새 지평을 모색한다는 뜻을 펼쳐 보일 예정이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출처 : 인사이트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