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8년 8월,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인화가 현재 심사정(1707~1769년)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평생의 화업을 정리하며 그동안 화가로서 쌓아온 모든 것을 한 작품에 모조리 쏟아붓는다. 한 폭의 장대한 산수화다. 인생살이의 수많은 굴곡을 상징하듯 높은 산과 거친 바위들, 깊은 계곡과 너른 강, 그 사이로 난 좁은 길을 펼쳐냈다. 자신의 인생길이 그러하듯 험난하면서도 또 아름다운 길이다.
현재의 작품 ‘촉잔도’(蜀棧圖)는 그가 타계 9개월 전에 그린 역작이다. 폭 58㎝에 길이가 무려 8m18㎝에 이른다. 조선시대 산수화 중 유례가 드문 대작이기도 하다.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 ‘촉도난’(蜀道難)을 주제로 촉 나라로 가는 여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신이 평생 이룩한 화법을 동원하면서 치밀한 구성, 다양한 색감의 담채로 산수화의 또다른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현재의 ‘촉잔도’를 비롯해 추사 김정희, 탄은 이정, 허주 이징, 긍재 김득신등 조선 중·후기 서화가들의 작품이 대거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의 지정이 예고됐다.
문화재청은 “조선 중후기 서화가 작품 6건과 조선시대 전적, 불화 등 모두 9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23일 밝혔다.
보물로 지정이 예고된 ‘이정 필 삼청첩(三淸帖)’은 조선 최고의 묵죽(墨竹) 화가로 평가받는 탄은 이정(1554~1626)의 작품이다. 탄은이 1594년(선조 27년) 12월 충남 공주에서 그렸다. 어두운 쪽빛으로 물들인 감색의 비단 위에 ‘삼청’(三淸·군자의 덕을 상징하는 매화, 난초, 대나무)을 아교에 섞은 금가루(금니)로 표현했다. 조선시대 사군자 그림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작품이자 탄은의 필력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는 점에서 학술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허주 이징(1581년~?)의 그림과 이식·이명한 등 당대 유명 문인들의 시문이 함께 수록된 ‘이징 필 산수화조도첩’도 보물이 될 예정이다. 이 서화첩은 허주가 도화서의 교수로 활약하며 예술적 기량이 최고조에 이르른 1652년(인조 20년) 쯤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화첩은 허주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기준작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서화 합벽첩’(合璧帖·보배로운 시와 글씨, 그림을 모아 놓은 첩)으로 작가와 제작 시기를 알 수 있어 회화사 연구에 귀중하다.
‘김득신 필 풍속도화첩’은 긍재 김득신(1754~1822년)의 풍속도 8점으로 구성된 화첩이다. 긍재는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를 계승하면서도 인물의 표정과 심리묘사에 자신만의 개성을 성취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서민들의 일상을 해학적인 감성으로 표현하되 상황과 역할에 따른 인물들의 움직임을 절묘하게 포착한 작품들이다.
‘김정희 필 난맹첩(蘭盟帖)’은 조선후기 대표적 서화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년)의 묵란화(墨蘭畵) 16점과 글씨 7점이 수록된 서화첩이다. 추사는 유명 작품을 여럿 남겼지만 묵란만을 모은 것은 두 첩의 이 ‘난맹첩’이 유일하다. 추사의 작품세계 이해와 더불어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 특히 ‘난맹첩’은 추사가 자신의 전담 장황사(표구 전문가)인 유명훈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김정희 필 서원교필결후(書員嶠筆訣後)’는 추사가 유명 서예가인 원교 이광사(1705~1777)의 서예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쓴 친필 원고다. 추사가 생각하는 서예이론의 핵심을 담은 글이자 추사체의 면모도 잘 드러나 추사의 작품은 물론 조선 말기 서예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라는 평가다. 이들 6건의 작품은 모두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품이다.
시서화 외에 전적, 불경과 불화도 보물 예고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송조표전총류(宋朝表箋總類) 권6~11’은 왕실 의례에서 국왕에게 올리는 표전(表箋·표문과 전문) 작성에 참고하기 위해 1403년(태종 3년) 송나라의 표전 중 모범이 될 만한 내용을 모아 놓은 책이다. 표전은 특정한 문체가 있어 당대 뛰어난 문장가가 작성한다. 이 책은 조선시대 들어 처음으로 국가에서 만든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로 인쇄해 고려와 조선의 활자 주조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다. 현존하는 계미자 인쇄본은 극히 드물어 ‘송조표전총류 권7’은 국보 150호로 지정돼 있는 상태다.
변상도가 수록된 ‘감지은니 범망경보살계품(紺紙銀泥梵網經菩薩戒品)’은 보살(수행자)이 갖춰야할 자세와 실천덕목을 담은 사경이다. 감색의 종이에 은가루로 필사하고, 변상도는 금가루로 섬세하게 그렸다. 변상도가 있는 조선시대 사경은 희귀하며, 특히 ‘범망경’은 ‘백지금니 범망보살계경’(1364년·보물 제1714호) 등 소수가 알려져 있다. 이들 전적과 사경은 모두 삼성미술관이 소장 중이다.
‘대곡사명 감로왕도(大谷寺銘 甘露王圖)’(원광대 박물관 소장)는 1764년 치상을 비롯한 13명의 화승이 참여해 그린 불화다. 경북 의성 대곡사에 봉안됐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명확한 제작시기와 제작자 등의 기록이 있어 18세기 불화 연구의 기준작으로서 가치가 높다. 이번에 지정 예고된 문화재들은 30일 간의 예고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로 최종 지정된다.
도재기 기자
jaekee@kyunghyang.com
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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