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죽

筍竹: 죽순과 대나무

이정(李霆, 1554~1626)
흑견금니
25.5×39.3cm
보물 제1984호 《삼청첩(三淸帖)》
탄은(灘隱) 이정(李霆)은 세종대왕의 고손으로 태어난 왕실출신 문인화가입니다. 30대부터 묵죽화로 명성을 떨쳤으나,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칼을 맞아 팔에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시련을 강인한 의지로 극복하고 필생의 역작을 남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삼청첩(三淸帖)》입니다. 《삼청첩》은 41세가 되던 1594년 12월 12일에 별서가 있던 충남 공주의 월선정(月先亭)에서 대나무 그림 12면, 대나무과 난이 어우러진 진 그림 1면, 매화 그림 4면, 난 그림 3면을 그린 뒤, 21수의 자작시를 덧붙여 꾸며낸 일종의 시화첩(詩畵帖)입니다.

<순죽>은 《삼청첩》에 들어 있는 작품 중 대나무의 생장 과정을 집약하여 담아냈습니다. 이 작품의 요체는 정밀한 사생성입니다. 잎맥의 느낌까지 섬세하게 살려낸 죽순, 땅에 떨어진 죽순 껍질, 이제 막 돋아나기 시작한 싱싱한 댓잎들, 땅속줄기의 마디까지, 형태와 세부묘사가 매우 정교하고 생생합니다. 대나무를 곁에 두고 늘 관찰하고 직접 그려보지 않았다면, 이런 사생력을 얻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정이 자신의 별서인 공주 월선정 주위에 천 그루의 대나무를 둘러놓은 이유를 알 듯합니다.

대나무 그림은 예로부터 글씨를 쓰는 방법으로 그려야 좋은 그림이 된다고 합니다. 중국 원나라 이후부터 금과옥조처럼 내려온 말이니, 이정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대나무를 쳐내는 방법을 일컫는 말이며, 그림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회화성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서예성과 회화성의 조화야말로 대나무 그림의 성패를 가늠하는 주요한 기준이 됩니다. 이정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이 <순죽>은 그 산물이며, 가장 성공적인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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