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엔 68년 만에 찾아온 수퍼문이, 전시장엔 그림과 비디오 아트 속에 달이 떴다. 인류가 지구에 살기 시작한 이래 달은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영원한 우상이다. 조선시대 화가 오원(吾園) 장승업(1843~97)의 ‘오동폐월(梧桐吠月)’은 오동나무 너머로 둥실 보름달 뜬 밤에 국화를 바라보는 개 한마리의 정경을 담았다. 나란히 놓인 현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의 ‘달에 사는 토끼’는 TV 모니터에 비춘 달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토끼 조각상을 배치했다. 백남준은 “달은 인류 최초의 텔레비전”이란 말을 남겼다. 달은 이렇게 도저히 맺어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것들의 간극을 이어주는 일종의 영매다.
지난 9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배움터 2층 디자인박물관에서 개막한 ‘간송과 백남준의 만남: 문화로 세상을 바꾸다’는 달처럼 우리를 비춰주는 한국 현대사의 두 인물, 간송(澗松) 전형필(1906-62)과 백남준의 해후 현장이다. 일제 강점기에 국보급 문화재의 수호자로 소임을 다한 간송, 1960년대부터 비디오 아트의 창안자이자 선구자로 세계 미술계를 휘저은 백남준의 정신을 작품으로 돌아본다.
서울 DDP서 내년 2월까지전시
이상향·상상력·깨달음 등
6가지 주제로 짝 맞춰 선보여
간송미술문화재단과 백남준아트센터는 각기 소장품 중에서 선별한 30여 점 씩을 내놓으며 여섯 가지 주제로 시공(時空)을 이었다. ‘복록(福祿)과 수명, 그리고 부귀의 상징’에는 백남준의 ‘비디오 샹들리에 1번’과 장승업의 ‘기명절지도’를 배열했다. ‘이상향을 찾아가는 두 가지 방법’에는 심사정(1707~69)의 대형 두루마리 그림인 ‘촉잔도권(蜀棧圖卷)’과 백남준의 ‘코끼리 마차’를 마주 놓았다. 낙원을 찾아 떠난 긴 여정의 기록이 세월을 넘어 조우한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달’ ‘파격과 일탈’ ‘세 사람’ ‘깨달음에 대하여’로 나뉜 작품 설치가 나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백남준의 ‘TV 부처’와 최북(1712~86)의 ‘관수삼매(觀水三昧)’는 고요한 선정에 든 수행자의 닮은 모습이 200년 틈을 잊게 한다.
간송의 탄생 110주년과 백남준의 타계 10주기를 맞아 성사된 뜻밖의 만남은 전시 제목처럼 ‘문화로 세상을 바꾸고자’ 삶을 불태웠던 두 거인의 꿈을 되새기게 해준다. 전시를 기획한 이진명 간송미술문화재단 큐레이터는 “우리 미술사에 수많은 대가들이 존재하지만 서로 연관성이 적어 보이는 이 다섯 명으로 전시회를 만든 이유는, 그들이 공통적으로 이상향을 지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술, 즉 문화로 세상을 바꾸고 좀 더 나은 삶의 방법을 찾고자 했던 이상주의자들의 만남에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이다.
전시장 들머리에서는 구범석 작가가 새 장르인 VR(가상 현실) 미디어를 활용해 제작한 ‘보화각’이 관람객을 맞는다. 간송미술관의 옛 이름인 보화각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은 이 공간을 4분 40초 동안 여행하고 나면 이들의 꿈이 우리 마음속으로 내려앉는다. 전시는 내년 2월 5일까지(월 쉼). 02-2153-0000.
글·사진=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출처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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