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 당대 최고 ‘보물 명화첩’ 공개한다
고려시대~구한말 역대 화가 작품첩 ‘근역화휘’
서울대박물관본 3책보다 시기 이르고 분량 훨씬 많아
한국 회화사의 보고 간송미술관이 간직해온 보물 명화첩의 전모가 처음 세상에 드러났다.
화첩 이름은 ‘근역화휘’(槿域畵彙). 일제강점기 당대 최고의 조선 서화 감식가였던 위창 오세창(1864~1953)이 1910~20년대에 고려시대 공민왕부터 조선 초 15세기 대화가 안견, 조선 중기 이징과 홍득구, 조선 후기 김홍도와 신윤복, 구한말 민영익과 이도영 등에 이르기까지 역대 주요 화가의 명화들을 엮고 정리한 11책짜리 화첩이다. 일제강점기, 조선 서화가 일본으로 넘어가는 세태를 안타깝게 여긴 오세창이 우리 문화유산을 수집·보존하는 일에 일생을 바친 증거이자 산물로, 한국 회화사의 백미라 불릴 만하다.
간송미술문화재단과 간송미술관은 15일 서울 성북동 미술관에서 언론설명회를 열어 이 화첩의 실체를 16일 시작하는 가을기획전에 처음 내보인다고 발표했다. 전시회의 제목은 ‘위창 오세창: 간송컬렉션의 감식과 근역화휘’. 미술관 설립자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스승이자 간송컬렉션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오세창의 탄생 160주년을 기리는 자리다.
현장에 가보니 미술관 2층 전시실 들머리에 11책 화첩이 놓인 진열장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왼쪽에 역대 명화첩 ‘근역화휘’의 표지 내지가 보였다. 화첩을 편집한 위창의 지인인 서예 대가 성당 김돈희가 위창에게 진상한다는 내력과 함께 쓴 ‘화휘’(畵彙)란 큰 예서 글씨가 쓰여 있었다. 미술관 쪽 설명을 들어보면, 표지 내지를 위에 얹은 본들이 가장 이른 시기 제작된 ‘근역화휘’ 7책본이다. 고려 공민왕의 양 그림부터 조선 말기 민영익의 묵란도까지 189명의 작품 244점을 담고 있다.
중간에 놓인 1점은 ‘현대첩’이란 부제를 단 1책본으로 1917년 만들어졌다고 한다. 오세창의 고모부 이창현의 묵란도부터 이한복의 ‘성재수간’까지 조선 말기~구한말 작가 32명의 작품 38점을 싣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세 책들은 직물과 문양 없는 종이로 장황한 천·지·인 3책본으로, 조선 중기 화가 이정의 묵죽도부터 근대기 화가 이도영의 ‘설리청자’까지 50명의 그림 70점이 실렸다. 책들의 간행 시기, 세부 책 권수나 실린 작품들 내역은 이날 처음 공개됐다.
‘근역화휘’의 다른 이본 또한 전해지고 있다. 위창이 1920년대 이후 별도로 엮은 다른 명작 화첩을 선물받은 친일 재력가 박영철이 1940년 경성제국대학(서울대의 전신)에 기증해 현재 서울대박물관이 소장한 천·지·인 3책본이다. 이는 2002년, 2022년 전시돼 선보인 바 있다. 이번 공개를 통해 서울대 본은 1종 3책인 데 비해 간송미술관 소장본은 11책이나 되고 훨씬 앞서 만들어진 것이 확인됐다. 서울대 본과 다른 부분이 상당히 많고 수록된 그림도 훨씬 폭넓다는 평이 나온다.
이번 전시에선 간송미술관 소장본 ‘근역화휘’ 3종(7책·1책·3책)을 비롯해 11책 본에 수록된 대표작품 39건 46점을 추려 선보인다. 연구진의 탐문 결과 1916년 완료된 7책이 현전 ‘근역화휘’ 중 가장 앞서는 화첩이고, 뒤이어 1917년께 근대 서화가로만 증보한 화첩이 1책으로 확인된다.
전시된 수록작들 가운데는 7책본 앞부분에 실린 15세기 세종시대 화가 안견의 그림과 14세기 고려 공민왕의 양 그림이 주목된다. 안견의 그림은 큰 삿갓을 쓰고 도롱이 차림으로 낚싯대를 들고 생각에 잠긴 한 사내의 모습을, 공민왕의 그림은 검은 얼룩과 갈색 얼룩을 띤 양 두마리가 걸어가는 모습을 세밀하게 그렸다. 전하는 작품이 거의 없는 고려 말과 조선 초 그림 대가의 실물 작품이란 점에서 소중한 미술사 자료다.
어부와 나무꾼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그린 17세기 화가 홍득구(1653~1703)의 ‘어초문답도’는 큰 화폭의 같은 제목 그림을 그린 이명욱의 작품으로 화가 이름을 적었다가 고증해보니 오기임을 알고 지운 흔적이 보여 흥미롭다. 1971년 제1회 ‘겸재전’ 이래 50여년간 무료 전시를 열어온 미술관은 올 가을전부터 입장료(성인 5000원, 청소년·어린이 3000원)를 받는다. 12월1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