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의 정신을 바탕으로 문예부흥의 초석이 되겠습니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최 완 수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 선생이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하는 것은 1934년부터였습니다. 일제(日帝)가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는 기운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간송은 민족문화가 일시 단절된다 하더라도 뒷날 나라를 되찾는 광복의 시기가 오면 문예부흥을 통해 그 단절을 복구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으로 문예부흥의 근거가 되는 일급문화재의 수집보호에 앞장서게 됩니다. 간송의 나이 29세 때였습니다. 이로부터 수집한 문화재를 수장 연구할 박물관 건립부지를 성북동에 마련하여 북단장(北壇莊)을 설립 하였습니다. 그리고 매해 일본인 수장가들로부터 우리 일급문화재를 고가로 매입해 들이니 1935년에 고려청자의 대표작이라는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환수하고, 1936년에는 혜원 신윤복의 대표작인 국보 135호 《혜원전신첩》과 겸재 정선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해악전신첩》, 현재 심사정의 대표작 〈촉잔도권〉 및 조선백자의 기품인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등을 구입했습니다.
1937년 일본의 중국 침략을 감지한 동경 거주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가 본국으로 귀국하며 살림을 정리하면서 당시 최고의 청자컬렉션을 간송에게 일괄로 넘기게 되니 국보 65호 〈청자기린유개향로〉, 국보 66호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 국보 74호 〈청자거위형연적〉, 국보 270호 〈청자모자원형연적〉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1938년 3월에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개정 공포하여 중등학교에서 조선어과목과 한문과목을 폐지합니다. 간송은 이런 참담한 문화말살 정책에 항거하기 위해 서둘러 북단장 안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건립했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간송미술관인데 윤 7월 5일에 상량하고 위창 오세창 선생이 정초명(定礎銘)을 지었습니다.
1940년 2월 11일에 일제가 창씨개명령(創氏改名令)과 국어(일본어)상용령을 내려 철저하게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 하자 간송은 『훈민정음』 원본을 고가로 사들여 우리 글과 말을 지키는데 획기적인 공로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매년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우리 일급문화재들은 보화각에 수장되었습니다. 그후 1962년 간송이 서거하고 나서 1966년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되는데 간송이 수집해 놓은 미술품을 연구 발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침내 1971년 가을부터 그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명되었습니다.
이후 매해 봄, 가을 전시회를 정례화하여 한 번도 거르지 않았으니 2024년 봄 전시는 제 94회에 해당합니다. 간송 선생의 수집 목적에 따라 우리 연구소는 근 반세기 동안 간송이 수집해 놓은 문화재를 자료 삼아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미술사연구를 통해 우리 역사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평가하는 일에 매진해 왔습니다. 그 결과 최근에는 매 전시 때마다 관람객이 수백 미터에 이르는 장사진을 치게 되었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공감 확산 현상으로 보고 더욱 연구에 박차를 가하여 문예부흥의 밑거름이 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