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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섭리는 미묘하여 창조하는 이가 있으면 파괴하는 이도 있고 파괴가 심할 때는 반드시 보호 유지하는 이가 나타나서 그 사라짐을 방지하여 소생의 기틀을 마련해 놓는다. 인류문화도 이와 같아서 일어나고 스러짐을 반복하며 끊이지 않고 흘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도 수많은 세월 동안 흥망성쇠를 무수히 되풀이하며 창조의 기쁨과 파괴의 쓰라림을 겪어 왔다.

불행하게도 1910년 8월 22일에는 한일병합조약이 강제 조인되어 우리나라는 유사 이래 최초로 일본에게 식민통치를 당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에 중국을 문화 진원지로 하는 상황에서 항상 문화 낙후성을 면치 못하여 문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은 이제 우리의 문화유산을 공공연히 파괴하고 마음대로 탈취해 가는 만행을 서슴없이 자행하게 된다. 조선 국권 탈취의 원흉들이 고려청자나 신라불상 및 역대 사경(寫經)과 조선시대 서화, 전적의 우수성을 크게 깨닫고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은밀히 이를 수집해 들이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인 잡류와 이들의 지시를 받은 조선인 불량배들이 옛 무덤을 도굴하고 무너진 절터의 유물을 옮겨오는 등 절도 행위도 서슴지 않으니 이로부터 우리 문화재가 골동가치로 평가되기 시작해 탐욕스런 일본인들의 손에 무한정 넘어 가게 되었다. 이는 국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문화재에 대한 애착이나 관심을 기울일 여유도 필요성도 느낄 수 없었던 당시의 절박한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암울한 시기에 마치 칠흑같이 어두운 동짓달 겨울밤에 소리 없이 떠오른 보름달처럼 반만년 문화유산의 멸실을 막아줄 위대한 인물이 홀연히 나타났으니 바로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 선생이다.
간송의 증조부인 전계훈(全啓勳, 1812~1890)은 배오개(종로 4가) 상권을 거의 장악하여 그 이득으로 왕십리, 답십리, 청량리, 송파 가락동 일대와 창동 일대 등 서울 주변을 비롯해서 황해도 연안, 충청도 공주, 서산 등 각처의 농지를 구입해 수만 석 추수를 받는 대지주였다. 간송의 부친인 전영기(全泳基, 1865~1929)는 무과출신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내었다.

간송은 전영기의 2남 4녀 중 늦둥이 막내아들로 태어난다. 월탄(月灘) 박종화(朴鐘和, 1900~1981)의 고모인 어머니 밀양박씨(1862~1943)가 45세이고 아버지가 42세나던 해인 1906년 7월 29일에 배오개 옛집(종로 4가 112번지)에서 탄생하였다. 손위 형인 형설(鎣卨, 1892~1919)과는 무려 14살이나 나이차가 있었다.

간송의 아버지와 숙부인 전명기(全命基, 1870~1919)는 각각 높은 벼슬을 지낸 수만 석 갑부로 종로 일대의 전채(錢債)와 상권을 장악하고 한 담장 안에서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축복받은 가정에서 간송이 큰댁에서 늦둥이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니 일가의 기쁨과 사랑이 얼마나 컸겠는가. 간송은 태어나자마자 숙부인 전명기에게 양자로 간다. 물론 이름만 양자이지 방을 바꾸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간송 돌사진 간송 돌사진, 1907년
간송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데가 많았다. 우선 용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서른 두가지 대인상(大人相)을 갖췄다고 할만큼 이목구비가 준수하고 신체가 단아하여 어디에 내어 놓아도 보름달덩이처럼 환하게 돋보이는 어린 아기였으며 살결 또한 백옥같이 희고 목화처럼 부드러웠었다 한다.

감성과 이성을 남달리 탁월하게 타고났던 간송은 글을 배우면서부터 서책과 지필묵을 극진히 애호하여 항상 새 것처럼 정결하게 사용하고 쓰고 난 뒤에도 이를 잘 정리하는 일을 천성으로 했으며 차차 서화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이에 대한 애호가 극진하여 벽에 걸기도 하고 갈무려 두기도 했다.

간송은 12세인 1917년 봄에 어의동공립보통학교(효제초등학교 전신)에 입학한다. 그런데 1919년 10월 27일에 이제 겨우 50세밖에 안된 양부 전명기 공이 홀연 타계한다. 이제 열네 살 밖에 안된 간송은 상주가 되어 양부이자 숙부인 전명기의 후사를 이어야 했다.

그런데 간송의 유일한 친형이요 본생가의 계승자인 전형설마저 불과 28세의 청년으로 아들을 두지 못한 상태에서 11월 10일에 갑자기 돌아가고 만다. 이렇게 형을 잃는 아픔을 당했으니 어린 간송의 낙담이 어떠했겠으며 그 본생부모의 아들 잃은 슬픔이 어떠했겠는가.
간송은 1919년의 슬픔을 겪고 나서부터 더욱 우수(憂愁) 어린 귀공자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인생과 부귀영화에 관해 깊이 생각하게 되고 자신과 가족의 장래에 대해서도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으며 나아가서 고종황제의 서거로 인하여 국가와 민족의 앞날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오복을 두루 갖춘 장안 갑부집안의 귀공자로만 머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간송은 자신이 장차 어떻게 처신하며 무엇을 하고 살아가야 할지를 대강 결정하는 듯하다. 갑자기 성숙해진 것이다.

이제 생가나 양가를 통틀어 배오개집에서는 간송이 유일한 적손이 되었으니 당시 관습법으로는 생가와 양가의 모든 재산을 장차 간송이 상속하게 되었다. 갑자기 두 집 재산을 아우른 십만 석 거부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생가 부모와 양가 모친의 기대와 걱정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주변의 선망과 유혹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극복하여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간송은 더욱 과묵하고 매사를 심사숙고하여 처리하는 신중한 애어른으로 급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간송은 16세인 1921년에 어의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다. 간송이 비록 이렇게 휘문고보에 진학하여 신식교육을 본격 받기 시작하지만 이제 집안의 유일한 계승자가 된 간송에게 그 후사를 강요하는 것은 당시 풍습으로 보아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간송은 양부의 삼년상이 끝나는 1921년 10월 27일 이후에 서둘러 결혼하는 듯하다. 아마 휘문고보 2학년 때인 1922년 봄 17세 때 일이었을 것이다.
휘문고보 야구부 사진 휘문고보 야구부, 2번째 줄 왼쪽에서 2번째가 간송, 1924년
그러나 한 살 위인 부인 고성이씨 종익(鐘翊)의 딸은 결혼한 지 불과 3, 4개월만인 1922년 6월 21일에 그만 갑자기 돌아가고 만다. 간송에게 또 하나의 상처만 입히고 떠나간 셈이다. 그래서 1년 뒤인 1923년에 김해김씨 창섭(昌燮)의 딸과 다시 혼인하니 이 부인이 장차 보성중고등학교 재단 이사장직을 26년 동안이나 지내는 김점순(金點順, 1905~1988) 여사이다.

이때 간송은 18세로 휘문고보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집안에서는 가문의 계승자로 재혼을 서둘러야 하는 새서방님이었지만 학교에 나가면 학업에 충실하고 운동과 음악, 미술 등 각 방면의 예능에 뛰어난 모범학생으로 운동시합을 하고 음악이나 미술을 감상하러 다니는 낭만소년(浪漫少年)일 뿐이었다.

간송은 휘문고보 시절 야구부에 들어 휘문을 대표하는 야구선수로 맹활약을 하여 여러 차례 휘문에 우승을 안겨 주는 영광도 가졌다. 간송은 4학년이 되면서부터 야구부의 부장으로 활약하며 일본 오사카에 가서 오사카중학교를 격파하기도 하였다.
이런 유쾌한 학교 생활 중에 간송은 남모르게 하는 일이 또 하나 있었으니 책 읽기를 좋아해 서점을 찾아다니며 신간은 물론이려니와 옛 한적(漢籍)들까지 손이 닿는 대로 사들고 오는 일이었다. 그런 간송을 부모님들은 여간 반기며 기특해 하지 않았다. 간송이 뒷날 「수서만록(蒐書漫錄)」이라는 수필에서 “나의 수서(蒐書: 책 수집)에 큰 힘이 된 것은 오로지 가족들의 많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돌아가신 아버님과 어머님께서도 내가 책을 옆에 끼고 집에 돌아오는 것을 좋아하셨을 뿐 싫은 낯을 하신 일이 없다.”고 한 말에서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근본부터 독서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었지만 책 자체를 모으는 취미도 곁들여져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내용에 별 흥미가 없을 책인데도 장정이 새롭다거나 체재가 이채로우면 문득 사고 싶었다 하니 아름다운 것을 보면 결코 지나칠 수 없게 타고난 탁월한 심미안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책을 모으는 취미가 장차 간송으로 하여금 우리 문화재들을 열정을 가지고 수집해 들이는 실마리를 열게 한다. 간송은 1925년에 졸업반인 5학년에 올라가자 도쿄 유학을 꿈꾸게 된다. 대학은 도쿄로 가서 우리를 식민통치하고 있는 일본의 심장부를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