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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를 수집하여 보호하겠다는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력 있는 일본인 수장가들과 불꽃 튀는 경쟁을 벌여야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골동품이란 항상 부귀를 따라 흐르는 것이라 이를 수집한다는 것은 막대한 재산과 이를 애호하는 지극한 정성을 겸비하지 않으면 차지하기 어려운 것인데 이제 30세도 안된 조선 청년이 모아 보겠다고 나섰으니 아무리 십만 석 지주의 유일한 상속인이라 할지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모르는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정의 슬픔 따위에 오래 묶여 있을 새가 없었을 것이다. 간송이 이 일을 수행해 가는데 어찌 어려움만 있게 했겠는가. 우선 오세창이라는 선각자를 미리 보내어 서화사 연구의 기초를 닦아 놓고 기다리게 했으며 오세창은 간송을 위해 이순황(李淳璜) 이라는 정직한 거간(居間) 하나를 키워 놓았다가 간송에게 붙여 주어 서화골동의 수집일을 전담하게 한다. 그야말로 삼박자가 척척 맞아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순황이 모아들이면 오세창이 감정하여 살 것은 사게 했으니 불과 25세 밖에 안된 청년 간송이지만 실수할 리가 없고 물건을 모아들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간송은 비록 아직 젊은 청년이지만 반만년 문화전통을 지닌 이 나라의 문화재를 수집 보호할 큰 임무를 맡고 태어난 인물이라 대인다운 금도(襟度)가 있어 한 번 신뢰하면 그 사람에게 그 일을 일체 일임하여 추호도 의심하는 적이 없었고 문화재를 구입하게 될 때는 달라는 금액을 깎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적게 부른다고 해서 값 아닌 값을 내고 산 적이 없었다. 원 주인이 그 가치를 잘 모르고 싼 값을 부르면 아무 소리 않고 그 두 배건 세 배건 간에 간송 자신이 판단한 가치 대로 그 대금을 지불해 주곤 하였다.
위창 오세창 사진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
1934년은 간송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였다. 문화재 수집을 본격화하면서 그것을 수장하고 연구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출만한 적당한 장소도 아울러 물색하고 있던 차에 합당한 터전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즉 지금의 성북구 성북동 정중앙 요지 만여 평을 구입하게 된 것이다.

플레장이란 프랑스 출신 석유상이 19세기 말에 서울에 와서 석유 팔아 번 돈으로 프랑스식 양옥을 짓고 살던 땅인데 간송은 주변 땅을 더 사 보태서 구준봉(狗蹲峰)으로부터 흘러 온 주맥의 명당 부분 거의 전부를 확보하였다. 명당에서 보면 안암산으로 이어지는 청룡줄기와 낙산으로 이어지는 백호줄기 사이에서 흐르는 두 시내가 각각 좌우에서 휘감아 돌아 흘러가는 그런 좋은 터였다.

이에 오세창은 이곳이 옛 선잠단(先蠶壇) 부근임을 상기하고 북단장(北壇莊)이란 이름을 지어준다. 이에 그 현액을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 1897~1940)이 썼는데 이한복이 방서(傍書)를 써 남겨서 1934년 음력 7월 16일 이전에 북단장이 개설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간송은 29세였는데 집안에서 하나의 큰 경사를 맞는다. 6월 2일에 3남 성우(晟雨)가 태어난 것이다. 아직 생존해 있는 생가와 양가 두 집 어머니의 기쁨이 어떠했겠으며 간송 자신인들 얼마나 흐뭇하고 든든하였겠는가. 훗날 이 아들이 보성고등학교 교장과 재단이사장을 맡아 간송의 육영(育英)의지를 잇게 된다.
이한복 '북단장' 사진 이한복, '북단장', 1934년
석호 한 쌍 사진
간송이 일본인 대수장가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던 우리 최고급 문화재를 회수해 오는 데는 아무래도 조선인 거간인 이순황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간송은 1934년부터 일본인 골동상인 신보기조(新保喜三)를 또한 전속 중개인으로 삼았다. 신보도 간송의 인품과 열성에 감복하여 민족 감정을 떠나서 간송에게 끝까지 의리를 지키며 어떻게 해서든 우리 문화재 중 최상품을 간송에게 돌아오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신보기조를 내세워 경성미술구락부(京城美術俱樂部)에서 행하는 골동품 경매에도 참여하여 우수한 미술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하니 1934년 3월 3일에 개최되었던 와타나베가(渡邊家) 소장품 경매에서는 석호(石虎) 1쌍을 기와집 한 채 값인 1천 2백원이라는 거금으로 사들여 북단장 입구를 지키게 하니 지금까지 이 석호 한 쌍은 그 소임을 다하며 묵묵히 북단장 입구에 서 있다.

한편 간송은 북단장 구역 내에 본래부터 있던 한옥 구가(舊家)에 표구소를 차리고 수집해 들인 서화를 새로 표구하거나 보수하여 영구 보존할 수 있도록 오동상자를 새로 만들어 보관하면서 그 상서(箱書: 상자 위에 쓰는 글씨)와 제발(題跋)을 오세창에게 부탁해 쓰게 하였다.
간송이 우리 일급 문화재를 수집해 들이는 데 얼마만한 열성과 정력을 쏟았으며 또한 얼마만큼 막대한 재산을 투입하였는지는 이루 말할 수 없다. 1935년에는 고려상감청자를 대표하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일본인 골동상 마에다 사이이치로(前田才一郞)에게서 2만원에 구입하였고 1936년 11월 22일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서는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을 1만 4천 580원으로 일본인 대수장가들을 물리치고 차지하였다.

1936년 1월 8일에 오세창은 간송이 구해온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에 발문을 쓴다. 일본 토미타(富田)상회 주인인 토미타 기사쿠(富田儀作, 1858~1930)의 손에 넘어 가서 세상에 보배 중의 보배로 널리 소개되면서 그 값이 한정 없이 올라 있는 혜원 신윤복 화첩을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손에 넣기 위해서 여러 해 동안 공력을 다 들여 끝내 일본인 수장가로부터 그것을 되사온 것이다.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이 일생일대에 심혈을 기울여 그려 낸 〈촉잔도권(蜀棧圖卷)〉은 길이가 8미터가 넘고 폭이 60센티미터 가까이 되는 산수도이다. 간송은 이 그림을 5천원에 구입하여 일본 교토에 보내 수리를 시키고 표구를 깨끗이 했는데 그 비용이 6천원이나 들었다 한다. 아무리 민족 문화재의 보호를 자임하고 나섰다 한들 너덜거리는 그림을 기와집 한 채 값이 천원 내외하던 시절에 그 5배를 내고 구입하기가 쉬웠겠으며 정밀한 복원 수리를 위해 산 돈보다 기와집 한 채 값을 더 얹어야 하는 엄청난 돈을 쓸 수 있었겠는가.

30대 초반에 모든 열정(熱情)을 문화재 수집과 보호에 쏟아 부었던 간송은 1936년 3월 9일에는 종로구 관훈동에 있던 고서점 한남서림을 1만1백70원에 매수해서 이순황 등으로 하여금 고서 및 서화류 등 문화재를 매입하는 창구로 운영하게 하였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13세기 사진 청자상감운학문매병, 13세기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18세기 사진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18세기
혜원전신첩 - 표지, 18세기말~19세기초 사진 혜원전신첩 - 표지, 18세기말~19세기초
심사정 '촉잔도권' 사진 심사정 '촉잔도권', 176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