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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은 21세인 1926년에 와세다대학 법과에 무난히 합격하여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되는데 이 해에 첫째 아들 광우(光雨)를 얻는 경사가 겹치게 되었다. 간송은 와세다대학에 재학하며 식민지 백성이 당해야 하는 수모와 멸시는 그렇다 치더라도 앞길이 보이지 않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제까지는 아무리 식민지화 한 나라일망정 고국의 수도 서울에서 가족과 함께 우리 고유의 생활방식대로 살아왔고 학교도 항일정신으로 뭉쳐진 민족계열 학교만 다녀서 대일 적개심을 키우며 나라를 되찾을 기회가 반드시 온다는 희망과 그것을 내 손으로 성취하겠다는 기개를 잃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 왔었는데 도쿄에 와 보니 그런 희망과 용기가 착각과 오산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회의와 의구심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고국에서는 서울 제일 갑부의 외동아들로 인물 좋고 공부 잘하고 운동 잘하며 음악 미술 등 예능에 뛰어난 재주를 타고난 만능의 미남 귀공자로 장안의 선망을 한몸에 모았던 간송이었기에 겉으로는 겸손하나 내심으로는 자긍심이 남달리 확고했던 간송의 자존심은 이런 상황 자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간송의 오기는 일본을 근본에서 굴복시킬 수 있는 어떤 일을 해내고 싶은 야망에 불길을 당겼다.
와세다(早稻田)대학 재학시절, 1927년 와세다(早稻田)대학 재학시절 사진
그래서 방학이 되어 고국에 돌아오면 장차 어떻게 해야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벗어나 광명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것만을 골똘히 생각하며 뜻있는 선배나 친지 그리고 스승들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간송이 가장 자주 찾아다니며 자신의 울분을 털어 놓았던 사람은 휘문고보 시절 미술교사였던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이었다.

간송의 탁월한 감성을 일찍 간파하고 있던 고희동은 휘문고보 시절 간송을 극진히 사랑했었는데 그 자신이 최초의 도쿄 유학생이 되어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돌아와 동양화로 전향한 인물이었으니 항일정신이 매우 투철하고 전통문화를 애호할 줄 아는 신지식층이었다. 따라서 간송이 처해 있는 입장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고 간송의 생각에 가장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스승이었다.

고희동의 집은 관철동에 있었으니 간송과는 같은 종로출신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고희동은 간송의 울분과 야망을 대강 짐작하고 이 암흑시대를 밝힐 수 있는 유일한 빛은 민족문화재의 수호라는 것을 은밀히 귀띔하게 되고 간송은 이 소리를 듣고 칠흑의 망망대해 중에서 등대를 만난 듯 눈앞이 환해져서 환호하며 방향타를 힘주어 잡게 된다. 그런 정황은 흰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차려 입은 청년 간송의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우리 민족의 지도자 한 분이 그런 토대를 은밀히 닦아 놓고 있었으니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었다. 오세창 역시 관철동 근처의 종로 출신으로 조선왕조 말기에는 개화를 선도하여 서구 문명의 수용에 앞장서기도 하였고 국망 후에는 천도교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하는 민족대표가 되기도 한 인물이다. 오세창은 추사학파의 학맥을 이은 정통 고증학자였기에 학식과 견문이 넓고 깊었다. 아울러 서화에 대한 감식안과 학문 고증이 탁월했으므로 이 방면에서는 당세 제일인자로 꼽히던 노대가였다.

23세의 대학생이던 청년 간송이 43세의 장년화가 고희동을 따라 65세의 노대가 오세창을 찾아가 뵈었을 때 첫 대면에 물고기와 물이 서로 만난 것과 같은 환희를 서로 느끼게 된다. 오세창은 손자뻘이나 되는 간송이 얼마나 대견하고 기특했겠으며 간송은 존장뻘의 오세창이 얼마나 푸근하고 믿음직스러웠겠는가. 이렇게 되어 간송은 오세창의 문하를 드나들며 추사 김정희 이래로 전해 내려오는 고증학을 익히고 서화골동의 감식안을 키워 나가며 서법과 화법 수련을 거친다.

간송이 오세창을 만나 웅지의 나래를 펴 나가려고 날개 짓을 배우고 있을 때 간송집안은 또 한 차례 연속되는 불행에 직면하게 된다. 형설에게 양자로 보내졌던 간송의 장자 광우가 1928년 두 돌을 다 채우지 못하고 요절하여 일가에 절망을 안겨 준다. 사랑하는 손자를 잃은 간송의 생부 전영기 역시 비통과 절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1929년 2월 26일 65세를 일기로 돌아간다. 간송이 대학 졸업반에 올라가던 해 초봄의 일이었다.

이렇게 되니 24세의 간송은 생가와 양가에 남은 유일한 적손으로 두 집안의 모든 재산을 일시에 상속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두 집안이 각각 수 만석 재산이었던지라 간송은 일시에 십만석을 일컫는 조선 최대 지주가 된 것이다. 이 엄청난 부의 주변에는 유혹의 손길도 허다할 수 있었겠으나 민족문화재의 수집보호라는 사명감을 안게 된 간송에게 다른 어떤 것도 보일 리 없었다. 생부의 서거와 장자를 잃은 아픔을 오로지 문화재를 수집하고 보호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잊으려는 듯 1930년 3월 대학 졸업 후에는 더욱 오세창 문하에 자주 출입하며 그 일에만 전심한다.
대학 재학 시절 방학 중, 1928년 대학 재학 시절 방학 중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