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어

鯉魚

이광사(李匡師, 1705~1777) · 이영익(李令翊, 1738~1780)
지본담채
120.5×57.5cm
동국진체로 이름을 드날린 명필 원교(員嶠) 이광사와 아들 신재(信齋) 이영익이 함께 그린 잉어 그림이다. 피라미 세 마리와 마름 밑에서 잉어가 용틀임하며 바닥에는 여뀌가 있다.
흔희 잉어 그림은 과거를 뜻한다. 두 마리 잉어를 그리면 소과 대과에 연달아 급제하기를 기원하는 뜻을 담은 그림이 된다. 피라미는 어린 시절을 뜻하고, 마름[浮萍草]은 타향살이를 뜻한다. 여뀌[蓼]의 한자 발음이 마침[了]과 같아, 학업을 마쳤음을 뜻한다. 그러니 일반적인 풀이라면 어려서부터 타향살이하며 고생하여 공부를 마치고 과거에 급제한 기쁨을 나타낸 그림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그림은 화제(畵題)가 말하는 내력이 남다르다.

원교선생이 잉어도를 그렸는데,
머리와 눈만 그리고 마치지 못하였다.
20년 후에 아들 영익이 동천(洞泉) 종형의 별장에서
이어 그렸으니 그때가 계사년 9월이다.
員嶠先生作鯉魚圖,
寫頭眼而未竟.
後二十年, 子令翊, 續成於洞泉從兄莊中.
時癸巳九月也.

이 계사년은 영도 49년(1773년)이다. 아들 이영익이 36세이고 부친 이광사가 69세 때이다. 따라서 이광사가 이 그림을 처음 그린 것은 49세 때가 되니 유배생활을 시작하기 바로 전 해가 된다. 이광사는 영조 31년(1755)에 나주괘서(羅州掛書) 사건으로 부령(富寧)에 유배되었다가 7년 뒤에 신지도(薪智島)로 옮겨 정조 원년(1777)에 73세로 생을 마감한다. 이영익은 부친이 유배될 때 부령으로 따라갔고, 신지도로 옮길 때도 따라갔으며 도중에도 부친을 찾아 함께 지내곤 하였다. 유배생활의 어려움을 함께 지내 더욱 끈끈하게 맺어진 부자간의 정리(情理)가 우연하게도 이 그림에 잘 배어 있는 듯하다.

대폭의 화면 절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하반부를 가득 채우고 자리잡고 있다. 잉어 위에는 수초와 피라미 세 마리가 한가롭게 헤엄쳐 강물의 표면임을 보여주고 아래로는 여뀌를 띄워 위아래를 구분하였다. 잉어와 수초 몇 잎으로 구성된 화면은 간략하기 그지없다. 이광사가 그렸다는 머리는 영롱한 눈동자의 표현과 더불어 잉어의 핵심을 이룬다. 곧추 선 등지느러미를 비롯하여 뒤튼 꼬리와 지느러미의 엇갈린 방향 등에서 잉어의 자세는 역동감을 한 껏 드러내지만 너무 두터운 꼬리로 인해 둔중한 느낌이 더해진다. 한겹 한겹 가지런히 그려내며 색조를 달리한 섬세한 비늘 표현이 잉어의 자태를 한층 기품 있게 만든다. 후손들이 내력을 중히 여겨 방에 걸어 온 듯 그림의 가장자리는 많이 헐었고 접힌 자국도 크지만 중심 부분은 잘 남아있다.

제사 내용은 이영익의 글로 보이고 ‘이영익(李令翊)’의 방형백문 인장을 찍었지만, 제사 중에 생존해 있는 부친을 ‘원교선생’이라 한 것을 보면 다른 사람이 그 사정을 밝히기 위해 써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영익이 그린 곳으로 적은 집은 그가 자주 어울려 지내던 사촌의 집인 듯하다. 이영익은 형 이긍익(李肯翊) 외에 이문익(李文翊), 이충익(李忠翊), 이천익(李天翊) 등의 사촌과도 많은 시를 주고 받으며 깊은 교유를 나누었는데, 여기 등장하는 동천(洞泉)은 백부의 아들인 이세익(李世翊, 1718~1775)으로, 자신보다 빨리 세상을 떠나 이긍익은 그를 위해 제문(祭文)을 짓기도 하였다. 이세진은 통진(通津)에 장사(莊舍)가 있어 사촌들의 모임터가 되곤 하였다.

이광사가 그렸다는 머리와 눈은 그림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런 그림을 아들은 20년을 간직하다 완성하였다. 외롭게 천리 밖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칠순을 맞는 부친을 생각하며 이 그림을 완성했을지도 모르겠다. 정쟁에 휘말려 벼슬에 나가보지도 못했지만 그럴수록 용틀임하는 잉어의 기상으로 그림으로나마 부친의 벼슬길을 열어 드리고자 했을까. 그림은 이들이 남긴 그림으로는 유별난 대작이다. 시작만 해 두었던 그림을 완성함으로써 그를 온몸으로 이어받아 자신도 한 경지를 이루어냈음을 부친에게 넌지시 알려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로부터 양명학(陽明學)을 전수받은 학자이자 명필로 이름났던 부친으로부터 학문과 글씨를 모두 고스란히 이어 받은 아들임을 생각하면, 부자지간에 이어 그린 이 그림이 그런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영익은 부친의 스승인 정제두의 손녀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가정을 이루었으니 외조부와 부친이 자신에게 가졌던 기대를 그만큼 잘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부친의 학문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그림을 이어 완성하고, 나아가 부친의 건안(健安)하심과 못이룬 관도(官途)에의 꿈과 무사 환향(還鄕)을 기원하는 여러 깊은 뜻이 이 한폭의 그림에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를 이어 일을 이루어 나가는 것은 언제나 보기 좋지만, 이들처럼 학문으로 예술로 이어간 모습은 더욱 아름답다. (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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