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죽

新竹, 새로 나온 대

신위(申緯, 1769~1847)
지본수묵
118.0×62.0cm
《난맹첩(蘭盟帖)》
신위는 10세 무렵부터 시서화 삼절로 불릴 만큼 천부의 재능을 타고난 인물입니다. 그래서 청년기인 정조대부터 이미 세간에 예명(藝名)이 오르내렸는데, 그중에서도 묵죽은 이정, 유덕장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일컬어질 만큼 명성이 높았습니다. 신위의 초년시절 묵죽화 수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스승 강세황이었습니다. 14세의 연소한 나이에 70세의 강세황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신위는 강세황을 조선왕조 400년 동안 수묵 사생을 제대로 한 유일한 인물로 상찬하고, 죽석에 대해서만 배운 것이 한이라고 회고하고 있을 만큼 강세황을 존숭하였습니다. 이에 신위의 묵죽화에 강세황의 자취가 짙게 드리워진 작품이 적지 않은데, 예보(禮甫)라는 자(字)를 가진 인물을 위해 그려 준 묵죽도 그중 하나입니다.

길고 가는 죽간을 V자 형태로 벌려 공간을 분할한 화면 구성, 피마준을 위주로 하고 몇 개의 태점으로 처리한 바위 형태 등에서 강세황 묵죽화와 유사성이 감지되며, 윤택한 필치로 엄정하게 묘사한 댓잎의 양태와 바위 묘사도 강세황 노년기 묵죽화와 유사합니다. 그런데 댓잎의 묘사는 강세황보다 더 한층 날카롭고 강인하며 기세가 충만합니다. 오히려 강세황보다는 이정, 유덕장 계열의 묵죽화풍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신위가 단지 스승을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대 묵죽화풍의 장처를 수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낸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이처럼 신위는 조선 묵죽화의 전개에서 심사정, 강세황에 의해 시도되던 남종문인화풍 묵죽화 양식의 완성도를 높였고 동시에 청대묵죽화풍을 새로이 수용하여 변화를 꾀하였습니다. 이는 조선후기 묵죽화풍의 종언이자, 조선 말기 묵죽화풍의 선구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신위를 이정, 유덕장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평가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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