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과투서

西瓜偸鼠

정선(鄭敾)
견본채색
30.5×20.8cm
겸재 정선의 그림은 정취보다는 기세를 중시하고, 감성보다는 이성에 호소하는 면이 강하다. 그런데 이 그림은 소재와 기법이 서정적이고 섬세하여 다분히 여성적인 미감을 보여준다. 이 그림을 보고 겸재보다는 조선의 대표적인 여류화가였던 신사임당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분명 겸재의 그림이다. 그것도 70대 후반 노년기에 그렸다.

들쥐 한쌍이 큼지막한 청수박을 훔쳐먹고 있다. 수박 속은 벌써 여러 날 들락거린듯 연분홍빛으로 곯아 있고, 이제 막 긁어낸 조각들은 선홍빛으로 싱싱하다. 직접 보고 사생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표현들이다. 수박 속에 들어가 먹고 있는 쥐와 밖에서 머리를 쳐들고 망을 봐주는 다른 한 마리 쥐의 묘사도 정확하고 세밀하다. 눈동자와 자세를 통해서 쥐의 심리상태까지 읽어낼 수 있을 정도이다. 화면 구성 또한 허술함이 없다. 화면 중앙에 주제인 수박과 쥐를 배치하여 집중도를 높이고, 연녹색의 덩굴을 동감있는 형태로 올려놓아 크고 짙푸른 수박 덩어리의 둔중함을 완화시켰다. 또 한 화면 오른쪽에 붉게 단풍든 바랭이풀과 아래쪽의 푸른빛 달개비꽃 한 무더기를 호응시켜 화면을 한결 다채롭고 자연스럽게 꾸며냈다. 사생과 구도, 색감의 조화까지 어느 하나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연암 박지원은 “겸재는 여든이 넘어서도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촛불아래에서 세밀한 그림을 그렸는데 털끝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라고 했다. 박지원이 말한 세밀한 그림은 아마 이 서과투서와 같은 그림이었을 것이다. 겸재 나이 여든이면 무엇하나 부러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국중 최고의 대가였다. 노대가의 눈 속에 비친 주변과 일상은 이 그림과 같이 따스하고 풋풋하며 생명력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한없이 사랑스럽고 정겹다.

error: Alert: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