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군포효

山君咆哮: 호랑이가 으르렁 거리다

이의양(李義養, 1768~1824 이후)
견본담채
129.0×48.7cm
숙종대 이후 화원화가들은 초상화를 그리는 전신(傳神)기법을 사용하여 용맹과 위엄을 갖춘 호랑이를 즐겨 그렸다. 정홍래와 김홍도 등의 맹호도가 전하는데 영모화 가운데 가장 인기 있으면서도 그리기 어려운 그림이 호랑이 그림이었다.

그런데 이의양이 그린 이 호랑이는 이전 선배화원들 그림과 좀 다른다. 이전 호랑이는 네 발을 모두 펴고 상체는 앞을 향하고 얼굴은 정면을 보거나 옆을 쳐다보며 걷는 당당한 모습이었는데 이의양의 호랑이는 앞발만 든 채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앉아서 먼 곳을 쳐다보는 힘 빠진 모습이다. 얼굴표정도 비록 이빨을 드러내긴 했지만 사나운 기운은 온데간데 없어 온순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것은 화원의 호랑이 그림이 영정조대를 지나 양식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랑이 얼굴은 생기가 있고 털 붓질은 정교하며 소나무 표현도 전통식이다. 단 암반 사이에 물을 흐르게 한 것은 장식화 현상으로 봐야겠다.

일본에는 호랑이가 살지 않지만 중국과 한국에서 전해진 여러 문물을 통해 일본인은 호랑이를 잘 알고 있었고 좋아하였다. 그래서 이의양이 신미년(1811)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인들의 요청을 받아 이 그림을 그려 주었다.

관서(款書)는 다음과 같다. ‘신미중하 조선국이의양이 신사(辛未仲夏 朝鮮國李義養爾信寫)’ 인장은 ‘신원(信園)’과 ‘이의양인(李義養印)’이다. (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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