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죽

風竹

이정(李霆)
견본수묵
127.5×71.5cm
탄은 이정은 세종대왕의 고손으로 태어난 왕실출신 문인화가이다. 그는 사군자, 특히 묵죽화에 전념하여 한국회화사상 최고의 묵죽화가로 평가받았다. 이 <풍죽>은 그의 묵죽화 중에서도 백미라 부를만한 작품이다.

거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대나무가 거센 바람을 맞아 요동치고 있다. 흐린 먹으로 그린 마치 그림자처럼 보이는 후면의 여린 대나무는 바람에 치여 쓰러질 듯 얽혀 있고, 댓잎들은 찢겨나갈 듯 나부낀다. 바람이 얼마나 강하게 부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진한 먹으로 처리한 전면의 대나무는 댓잎만 강한 바람에 나부낄 뿐, 튼실한 줄기는 탄력있게 휘어지며 바람에 맞서고 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이다. 간결한 화면구성, 극명한 흑백과 농담의 대비, 굳센 필치로 인해 화폭 전체에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화면의 집중도를 높이고 대나무의 기세를 분산시키지 않기 위해, 바위나 흙의 묘사를 자제하고 최대한 간결하게 처리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듯한 느낌을 받을 만큼 엄정하고 강렬하다. 고난과 시련에 맞서는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풍죽의 의미를 이만큼 잘 살려낸 작품은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탄은 이정은 선조에서 인조 시기를 살았던 문인이다. 조선전기 사회가 저물고 후기사회가 열리는 격변기였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건실성과 역동성, 대규모의 전쟁과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비롯된 절박함과 비장함, 그리고 전란을 극복해 낸 긍지 등을 이 풍죽에 온전히 녹여냈다. 더구나 그가 임진왜란때 왜적에게 칼을 맞아 오른팔이 잘려나갈 뻔한 시련을 겪었던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 <풍죽>에서 흐르는 고고함과 강인함은 단지 붓끝의 기교로 얻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현재 오만원 지폐 뒷면에 들어 있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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