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죽

風竹

이정(李霆, 1554~1626)
견본수묵
127.5×71.5cm
한국회화사상 최고의 묵죽화가로 평가받는 이정의 묵죽 중에서도 백미로 꼽힐만한 작품입니다. 비록 기년(記年)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정 묵죽화의 특장이 원숙하게 베풀어져 있어 만년기에 쳐낸 것으로 보입니다. 역대 제일의 묵죽화가가 그려낸 최고의 수작이니, 우리나라 최고의 묵죽화라 하여도 지나친 찬사가 아닐 것입니다.

거친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린 대나무 네 그루가 휘몰아치는 강풍을 맞고 있습니다. 뒤쪽 세 그루 대는 이내 찢게 나갈 듯 요동치지만, 전면의 한 복판에 자리한 한 그루의 대나무는 댓잎만 나부낄 뿐 튼실한 줄기는 탄력있게 휘어지며 바람에 당당히 맞서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주인공입니다. 그림자처럼 옅은 먹으로 처리한 후면의 대나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거센 바람의 강도를 느끼게 하는 한편, 주인공을 한결 돋보이게 하는 조연들입니다. 바위나 흙의 간결한 묘사도 다소 투박하고 서툴게 보일지 모르지만, 대나무에 시선을 모아 집중도를 흩트리지 않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화폭 전체에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정중동(靜中動)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돕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을 받을 만큼 엄정하고 강렬하여 숨이 멎을 듯합니다. 쉽사리 다가가기 어려운 일종의 경외심마저 느껴집니다. 고난과 시련에 맞서는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풍죽 본래의 의미와 미감을 이만큼 잘 살려낸 작품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거니와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정이 이 같은 걸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요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천부의 자질과 부단한 수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왕손이자 조선의 선비로서 흐트러짐 없이 격변의 시대를 당당하게 걸어갔던 올곧은 삶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정이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칼을 맞아 팔이 잘려 나갈 뻔한 시련을 겪었던 사실을 떠올린다면, <풍죽>에서 흐르는 고고함과 강인함은 그저 붓끝의 기교로만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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