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葡萄圖

신사임당(申氏)
견본수묵
31.5×21.7cm
신사임당(1504~1551)은 화조나 초충을 잘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그녀가 살던 시기에는 그보다는 산수와 포도 그림으로 화명이 높았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지은 ‘선비행장(先妣行狀, 돌아가신 어머니 행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자당(慈堂)께서는 늘 묵적(墨迹)이 남다르셨다. 7세 때부터 안견(安堅, 1418~?)이 그린 것을 모방하여 드디어 산수도를 그리셨는데 지극히 신묘하였고, 또 포도를 그리셨다. 모두 세상이 흉내낼 수 없는 것으로 그리신 병풍과 족자가 세상에 널리 전해진다.(慈堂平日墨迹異常. 自七歲時, 倣安堅所畵, 遂作山水圖極妙, 又畵葡萄. 皆世無能擬者. 所模屛簇, 盛傳于世.)”

그러나 초충이나 화조에 비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임당의 포도 그림은 지극히 드물다. 이 <포도> 정도가 회자될 뿐이다. 이 <포도>는 소위 《석농화첩(石農畵帖)》으로 불리는 《해동명화집(海東名畵集)》 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진경시대 후반기의 대수장가였던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이 수집한 그림이다. 석농은 ‘임자 윤달 15일에 월성(경주의 별명, 경주 김씨라는 의미) 김광국이 손을 씻고 삼가 배관한다.(壬子潤月之望, 月城金光國盥手敬觀.)’고 써 놓아 정조 16년(1792) 임자 윤 4월 15일에 이를 배관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림이 다소 잘린 감이 없지 않지만, 화면의 중심선을 따라 줄기를 내려뜨리고 하단부에 넓은 잎과 큰 포도송이를 배치하여 안정된 구도를 취하였다. 짙고 옅은 먹을 적절히 구사하여 싱그럽게 익어가는 포도알의 양태를 실감나게 옮겨냈다. 또한 젊고 싱싱한 줄기는 진한 먹으로, 늙고 오래된 줄기는 옅은 먹으로 처리하여 사실성과 더불어 생동감과 변화감까지 잘 살려냈다. 먹으로만 그린 수묵화임에도 포도의 외양과 풍취가 생생하게 전해온다. 전문화가 못지않은 숙련된 솜씨로 이 정도면 당대 최고의 필력과 기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그림은 사임당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오만원권 지폐에 신사임당 초상 뒤에 도안화되어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사임당의 그림으로 전해오는 대개의 그림이 그렇듯이 이 작품에도 낙관이나 관지는 없다. 하지만 영조대 문인인 동계(東谿) 조구명(趙龜命, 1693~1737)이 지은 사임당을 기리는 글이 별지로 붙어 있고, 부드러운 필치와 담백하고 섬세한 묘사에서 여성적인 우아함이 느껴진다. 이런 까닭에 이 그림이 오랫동안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수용되고 간직되었던 듯하다. 옛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고, 기억하고 싶어 했던 사임당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포도>의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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