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선

茗禪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지본
115.2×57.8cm
명선(茗禪)이란 ‘차를 마시며 선정에 들다.’ 혹은 ‘차를 만드는 선승(禪僧)’이라는 뜻이다. 추사는 ‘명선’이라 쓴 큰 글씨 좌우에 이 글씨를 쓰게 된 사연을 직접 썼다. “초의(草衣)가 스스로 만든 차를 보내왔는데, 몽정(蒙頂)과 노아(露芽)에 덜하지 않다. 이를 써서 보답하는데,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필의로 쓴다. 병거사(病居士)가 예서로 쓰다.” 라는 내용이다.

초의는 추사와는 30세에 만나 42년간 금란지교(金蘭之交)를 나누었던 동갑나기 승려 친구이다. 두 사람은 신분이 달랐지만 학문과 예술, 그리고 다도(茶道)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초의는 추사의 글씨를 지극히 좋아했고, 추사는 초의의 차를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추사는 무시로 초의에게 차를 보내줄 것을 당부하고 재촉했다. “나는 스님을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스님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와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 못하고 쉽사리 부수어 버리지도 못하여 또 차를 재촉하니 편지도 필요 없고 다만 두 해의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는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농담 섞인 협박으로 두 사람의 격의 없는 우정을 잘 보여주는 편지 글이다.

추사는 50대 무렵 벼슬살이에 뜻을 접고 병거사(病居士)를 자처하며 과천에 있는 별장에서 은둔해 있었다. 험난하고 고단한 시절, 좋은 차를 마시는 것은 추사에게 더할 나위없는 즐거움이자 위안이었다. 이때 초의가 차를 만들어 보낸다. 초의가 보낸 차는 천하 제일의 명차로 불리는 중국 사천성의 몽정차와 강소성의 노아차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추사는 그 보답으로 ‘명선’ 두 자의 글씨를 써서 초의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추사는 이 글씨를 쓰면서 한나라 때의 비석인 <백석신군비>의 글씨를 참고했다. 백석신군비는 중국 하북성 백석산에 산신(山神)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추사의 스승인 옹방강은 백석신군비에 새겨진 글씨를 극찬했고 추사도 무척 좋아했다. 추사는 네모 반듯하고 굳센 필치의 <백석신군비> 글씨가 지닌 특징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 장중함과 졸박함을 더하여 한 차원 높은 경지로 승화시켰다. 존하는 추사의 글씨 중 규모가 가장 크며, 필치 또한 탁월하다. 그래서 50대의 글씨이지만, 추사 글씨를 대표할 만한 명작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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