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란

墨蘭

민영익(閔泳翊, 1860-1914 )
지본수묵
124.2×61.3cm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은 구한말 격동기의 한복판을 살다간 문인이자 정치가이자 예술가였습니다. 혼란과 격동의 시기,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민영익의 인생은 실로 파란만장했습니다. 명성왕후의 친정조카로 20세 무렵에 민씨세도의 중심에 섰으며,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때는 개화파의 공격을 받아 전신에 자상(刺傷)을 입고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위기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회복한 후에도 국내외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홍콩과 상해를 전전하다, 결국 상해로 망명하여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러나 영욕이 교차하는 정치가로서의 삶과는 달리 예술가로서의 삶은 찬연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묵란화에 쏟은 애정은 남달라, ‘난 걸인(蘭匃)’이라는 별칭까지 얻을 정도였습니다. ‘운미란(芸楣蘭)’이라 불리는 민영익의 개성 넘치는 묵란화는 이런 관심과 노력의 산물입니다. 이 <노근묵란>은 민영익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난만하게 꽃을 피운 난을 상하로 나누어 무더기로 그려 놓았습니다. 이렇게 무더기로 난을 그리는 것을 총란도(叢蘭圖)라고 합니다. 조선말기에 유행하던 형식 중 하나로 이하응도 만년에는 이런 형식의 난을 즐겨 그렸습니다. 그러나 운미난은 석파난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칼칼한 농묵의 붓질로 하단에 짧은 난잎을 촘촘하게 그려 넣고, 두세 개의 잎을 길게 뽑아냈습니다. 수직으로 곧추선 난잎은 일정한 굵기로 나아가다 갑자기 붓을 떼어내어 뭉툭하게 처리했습니다. 붓을 여러 차례 떼고 누르기를 반복하다, 잎의 끝을 가늘게 마무리했던 석파난과는 사뭇 다릅니다. 마치 강철로 만든 회초리를 보는 느낌입니다. 고고하고 청초한 맛은 떨어지지만 굳세고 단단합니다. 나라를 잃은 사대부의 반성과 결의를 담아 이렇게 그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난의 뿌리 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이런 생각이 지나친 억측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흙이나 바위 위에 그리는 일반적인 난의 모습이 아닙니다.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 뿌리가 죄다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일찍이 난을 이렇게 그린 화가가 있었습니다. 중국 남송말(南宋末)의 묵란화가 정사초(鄭思肖, 1241∼1318)입니다. 정사초는 이민족인 몽고에게 나라를 잃고, 그 울분을 난을 그리며 달랬다고 합니다. 그런데 난을 그리면서, 뿌리가 묻혀야 할 땅은 그리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잃었으니, 난인들 뿌리내릴 땅이 있겠냐는 의미였습니다. 운미는 정사초의 정신과 뜻을 받들어 이와 같이 난을 그린 것입니다.

화면 우측 상단에 ‘민원정이 천심죽재에서 그리다(閔園丁, 寫於千尋竹齋)’라는 관서로 보아 상해 망명시절에 쳐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밑으로 ‘송석원을 쓸고 닦는 남자’라는 의미의 송석원쇄소남정(松石園?掃男丁)’이라 새겨진 방형주문의 인장을 찍어 마무리하였습니다. 송석원은 인왕산에 아래 있던 민영익의 별서(別墅)이니, 망명객의 애환이 절절이 묻어나는 인장입니다.

error: Alert: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