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란

墨蘭

이하응(李昰應, 1820~1898)
지본수묵
27.3×37.8cm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란 이름으로 더욱 익숙한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난초 그림입니다. 대원군이라는 왕실 출신의 신분적 배경과 19세기 후반 격동의 시대에 펼쳤던 정치적 이력으로 인해 정치가로서의 면모가 강했던 이하응은 타고난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이하응의 예술적 재능은 사군자 그림에서 탁월한 빛을 발했는데, 스승이었던 추사 김정희로부터 난초 그림에서 만큼은 최고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묵란화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그림은 그러한 이하응의 난초 그림 가운데 30대 중반의 건실한 자기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하응의 난초 그림을 모아 놓은 《석파묵란첩(石坡墨蘭帖)》 안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화첩이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며 김정희로부터 그림과 글씨를 배우던 이하응의 30대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추사의 예술세계에 공감하던 석파의 예술 세계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실제로 화첩에 수록된 다수의 그림들이 스승 추사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그런 면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른편 화면을 가득 채운 훤칠한 키의 난초가 일제히 왼편으로 잎을 벋었습니다. 훌쩍 자란 세 줄기 잎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가늘면서도 긴 줄기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짙은 먹으로 그려진 긴 난잎과 맑고 옅은 먹으로 표현된 짧은 난잎과 꽃대는 농담의 차이를 통해 화면의 깊이감을 보여줍니다. 향기를 뿜어내는 꽃대들 역시 잎과 함께 왼편으로 기울어 마치 한 마음으로 함께 하는 듯합니다. 그림에 적혀 있는 글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같은 마음의 말은 그 향기가 난과 같다. (同心之言, 其臭如蘭.)

『주역(周易)』의 13번째 괘인 ‘천하동인(天下同人)’에 나오는 글입니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도 자를 수 있으며, 그처럼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그 향기로움이 난초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스승의 학문과 예술을 흠모하던 젊은 날 이하응의 기개와 의지가 엿보입니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군자와 난초의 외유내강(外柔內剛)이 잘 표현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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