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호접

薔薇蝴蝶: 장미와 나비

이경승(李絅承, 1862~1927)
견본채색
151.5×38.8cm
예로부터 나비는 초충화는 물론이거니와 화훼화에서도 크게 애호되던 소재였다. 나비의 화려함과 자유로움에서 기쁨과 영화를, 꽃과 어울리는 모습에서 남녀간의 연정이나 부부간의 화목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에 덧붙여 나비를 지칭하는 ‘접(蝶)’의 발음이 80세 노인을 뜻하는 글자인 ‘질(耋)’과 같아 장수의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으니, 형상과 의미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는 화재(畵材)였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여러 화가들이 나비를 화폭에 담아내곤 하였는데, 조선중기의 신사임당, 조선후기의 정선과 심사정, 조선말기의 조희룡과 남계우의 나비 그림이 특이할 만하다.

나비 그림은 이후 근대화단에 이르러 더욱 성행하게 된다. 나비가 지닌 다양한 형태와 화려한 색채가 당시 화단의 지배적인 취향 중 하나인 화사한 장식성을 담아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소재였기 때문이다. 이에 많은 화가들이 나비를 소재로 한 그림을 다투어 그리게 되니, 그중에서도 이경승은 남계우 이후 나비 그림의 최고 명가로 화명을 떨친 인물이다.

이경승이 이처럼 나비 그림으로 일가를 이루게 된 것은 같은 연안(延安) 이문(李門) 출신인 이교익(李敎益, 1815~1873)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교익은 집에 날아든 나비를 잡아 그 색채를 연구하려고 호고(壺谷, 서울대학병원 남쪽 원남동 일대)에서 성북동까지 쫓아갔던 일화가 전해질 만큼 나비 그림에 전력하여 남계우에 버금갈만한 솜씨를 보여주었던 인물이었다. 이경승이 이교익에게 직접 그림을 배웠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화업의 길로 뛰어든 이경승에게 한 동네에 살았던 대부(大父) 이교익의 명성은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 나비 그림은 이경승의 6폭 호접도 중 2폭으로, 전체적인 화면의 구도와 극채 공필 위주의 세밀하고 사실적인 나비의 묘사에서 조선말기 남계우나 이교익 등의 나비 그림의 영향이 강하게 묻어난다. 그러나 나비 무리를 화면 전체를 압도할 만큼 과도하게 진설하고 그 배경으로 꽃과 풀을 부수적으로 그려 넣었던 전대 나비 그림 양식과는 달리 꽃과 풀, 그리고 바위를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다소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주변 경물 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마치 나비의 표본을 보는듯한 즉물감은 약화되고 자연 상태의 나비를 사생한 듯한 증가되는 효과를 내고 있다. 다채롭고 자연스러운 나비의 태세와 벌과 풀벌레 등을 함께 그려 넣은 점에서도 사실성을 중시하고 있는 작자의 의도가 감지된다. 다만 지나치게 정교한 경물들의 묘사나 석록으로 처리한 태호석의 화려하고 정형적인 양태에서 형식화된 장식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당대의 취향과 미감이니 이마저 떠쳐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각 폭마다 서체를 바꿔가며 나비와 관련된 고사나 싯귀를 인용하고 있어, 이경승이 정치한 화기(畵技) 못지않게 나비에 대한 문학적 이해도 정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장미호접>
그 크기는 박쥐와 같고 흑색이거나 반점이 있으니,
흰 봉황의 아들(호랑나비)라 부르기도 하고 신선의
수레(범나비)라 부르기도 한다. 강남의 귤나무 사이에 있다.
이당
其大如扁?, 或黑色或班. 名白鳳子, 一名鳳車生. 江南橘樹間. 怡堂

error: Alert: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