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여가

讀書餘暇: 글 읽다 남은 겨를

정선(鄭敾)
견본채색
24.0 × 16.8 cm
〈독서여가〉는 《경교명승첩》 하권 맨 처음에 장첩된 그림이다. 겸재가 50대 초반 북악산 아래 유란동(幽蘭洞)에서 생활하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낸 자화상이라고 생각된다. 인왕곡 인곡정사(仁谷精舍)로 이사 가기 직전인 52세경에 기념으로 그려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랑채의 지붕이 초가지붕이라서 인곡정사 사랑채의 기와지붕과 다르기 때문이다. 실제 이 그림에서 보면 인물화 역시 상승에 이른 것으로 오히려 관아재를 능가한다 할 수 있겠다.

바깥 사랑채에서 독서의 여가에 잠시 더위를 식히며 한가롭게 시상(詩想)에 잠겨 화리(畵理)를 탐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사생적인 필치로 그려냈다.

앞문은 다 떼어내서 활짝 트여있고 곁문도 열어젖혔는데 방 앞에 잇대 놓은 두 쪽 송판 툇마루 위에 한 선비가 나 앉아 화분에 담긴 화초를 감상하고 있다. 옥색
중치막에 사방관(四方冠)을 쓰고 오른손에 쥘부채를 펴 든 채 비스듬히 안락좌(安樂坐) 형태로 기대 앉아 망연히 화분에 정신을 빼앗긴 상태다. 화리(畵理)를 탐구하는 화성(畵聖)다운 면모라 하겠다.

수염은 많지 않고 이마는 단단하며 이목구비가 분명하여 청수(淸秀)한 기품이 감도는 동안(童顔) 형태인데 체수는 작달막하다. 조선 사대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삿자리가 깔린 방안에는 서책(書冊)이 질질(帙帙)이 쌓인 책장이 맞은편 벽에 기대어 있어 겸재가 학문하는 선비임을 말해주는데 그 책장 문에 장식된 겸재 그림에서 이 방이 겸재의 서재임을 실감할 수 있다. 쥘부채에 그려진 그림 역시 겸재 그림이다. 열어젖힌 곁문을 통해 해묵은 향나무의 뒤틀린 굵은 둥치가 보이는데 그 푸른 가지는 초가지붕 앞까지 뻗어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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