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박지철채연화문병

粉靑沙器剝地鐵彩花文甁

15세기
높이 20cm
보물 287호
조선 초기에는 왕조 교체와 함께 정치체제와 사상, 심지어 그릇까지도 새로운 이념과 지배계층의 기호, 중국의 자기 양식의 변천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던 청자는 점차 쇠퇴하고 생산을 담당하던 가마와 장인들도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전국 곳곳에서 새로운 가마를 짓고 만들었던 그릇은 태토는 청자에 가깝지만 장식과 유약 등에서 새로운 시도를 담고 있었다. 이것이 훗날 분청사기라 부르는 자기들이다.

분청사기는 다양한 문양과 장식, 대담하고 해학적인 문양, 거친 표면감 등이 매력적인 그릇이다. 장식을 보면 고려시대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상감, 인화, 음각, 철화 기법 이외에 백토 분장을 하고 문양의 여백을 긁어내는 박지, 백토물에 그릇 전체를 담갔다 꺼내는 덤벙, 백토를 두터운 큰 귀얄 붓으로 바르는 귀얄 등의 기법이 새롭게 응용되었다. 또한 이들 기법을 하나의 그릇에 다양하게 응용하기도 하였다.

이 병은 이러한 다양한 분청사기 기법이 시도된 아담한 크기의 병이다. 백토분장을 하고 문양을 음각하였으며 일부를 긁어내고 여백에 산화철 안료로 칠하여, 음각과 박지, 철화 기법을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병의 형태를 보면 구연부는 외반되었고 목이 짧으며 배는 통통하다. 이러한 형태의 병을 중국에서는 옥호춘(玉壺春)이라는 음식집에서 사용한 것에 유래하여 옥호춘병이라 불렀다. 주로 12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해서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에 걸쳐 유행하였다. 문양은 몸체 상하 종속문 음각선 가운데, 윤곽선을 따라 조각한 두 개의 커다란 연꽃을 배치하였고 여백에 간략하게 작은 연잎을 두 개 조각하였다. 구연부 아래에는 연판문 종속문대가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바닥에는 굵은 모래 받침이 그대로 붙어 있어 번조 과정을 보여준다. 몸체 하단부에 균열이 가 있으며 일부 함몰되었다. 약한 청색을 띤 유약은 일부 뭉치거나 핀 홀(Pin hole)현상이 보이며 내부는 구연부만 시유되었다.

error: Alert: Content is protected !!